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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복권

“참? 당신 복권 샀어요?”  토요일 저녁, 뉴스가 끝나고 TV화면에 로또복권 추첨 장면이 나오자 아내는 잠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낸 듯 다짜고짜 물었다. “아니?” 아내는 경찰서 강력계 형사가 전과 24범을 취조하듯 큰소리를 치며 왜 로또 복권을 구입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왜는 무슨 왜, 안맞을 게 뻔하니 안샀지.” 기대했던 것보다 그 이유가 대수롭지 않으니 아내는 더 화가 나는 듯했다.  얼마전 아내가 꿈속에서 숫자가 씌여진 공들이 날아다는 꿈을 꾸었다며 이번주에 반드시 로또 복권을 구입해달라는 얘기를 했었다. 꿈에서 보았다는 번호는 0과 1, 그리고 8이었다. 꿈을 꾸려면 제대로 꾸던가 아니면 숫자를 보려면 끝까지 다 봐야지 세 가지 숫자만 달랑 기억한다니 이게 뭐 도움이나 되는..

갈등의 반복

"어머, 너무 예쁘다!~""그냥 행사장에서 만원 하기에 사온 거야."  주말을 이용해 분당 누나댁에 들렀더니 누나가 후연이와 의연이 입히라며 겨울파커 두 개를 꺼낸다. 짙은 카키색 파커가 앙증맞으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인다.  "이거 정말 만원이래요?" 아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뒤집어 보더니 큰 아이 후연이에게 입혀 본다. 그리고 매우 기분이 좋았는지 작은 아들 의연이도 부른다. 옷을 입히려고 비닐 포장을 뜯으니 앞 지퍼 부분에 예리한 도구에 의해 옷이 약간 찢어져 있었다. 아마도 포장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인 것 같았다. 잔뜩 기분을 내던 누나는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와 아내는 그 정도 상처는 대충 꿰매어 입으면 된다며 얼른 분위기를 업(UP)시키려 했으나 힘들게 옷을 사온 누나 입장에서는 ..

오징어

"이거 맛있는 거야, 먹어봐, 맛있어"  아내는 며칠전에 사둔, 그러나 맛이 없어 식구 모두에게 찬밥 대접받고 있는 오징어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그리고 어려서 말을 못해 반대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둘째 의연이에게 계속 오징어를 주고 있다. 그 오징어라면 넓적한 한 마리의 오징어가 아니라 요리하게 좋게 채로 썰어둔 오징어로 주로 술안주로 쓰이기도 하고 매콤하게 버무려 반찬으로 자주 등장하는 그 오징어였다. 그 오징어는 지난 달 집앞 엄마손마트에서 산 것인데, 나는 맛없어 보인다며 거부한 것을 혼자 고집을 부리며 산 것이었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이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냉장고에 머무르자 참다못한 아내가 그것을 꺼내 들고 상대적으로 만만해보이는 둘째 의연이에게 오징어를 먹이고 있는중이었다. 김치나 된장..

삐걱거리는 욕실 문

"아니, 이 문 정말 안 고칠 거예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는 빚 독촉하는 사람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욕실 문이 고장이 났는지 며칠전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나기 시작했다.       좁은 집이어서 삐걱거리는 욕실문의 여닫는 소리는       집안 식구들 모두의 교감신경과 청세포의 기능을 마비시킬 것만 같은       음산하고 날카로운 괴성이었다.       더욱이 모두들 잠들어 조용한 밤에 한번 욕실을 들락거리려면    그 날카로운 소음에 온 집안이 진동할 것만 같았다.             "알았어. 어디 한번 보고."            며칠전부터 고쳐야한다고 앵무새처럼 말했지만       그런 걸 고칠만한 능력이나 의지 따위는 진작부터 가지고 ..

미꾸라지

"어라? 이건 또 뭐야?"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아이들이 물통 하나씩을 들고 다니고 있다. 뭐기에 그리 재미있는 표정으로 다니는지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1.5리터 짜리 페트병을 잘라 만든 물통 안에 미꾸라지가 3마리가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넣었지요. 그러다 그냥 키우면 되고..." 궁금한 내 표정을 질문으로 읽은 아내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담담히 얘기하고 있다. 세상에 많은 물고기 중에 하필이면 집에서 미꾸라지를 키우나. 굳이 뽀뽀하기 좋아하는 키싱구라미나 색깔 좋은 네온 테트라가 아니라도 주변에 쉽게 찾아보면 금붕어도 있고 조금만 민물고기도 있는데 하필이면 왜 미꾸라지인가. 빛깔 좋은 열대어나 금붕어가 아니라면 비무장지대의 맑디맑은 물에서 산다는 쉬리도 좋고, 모 개그맨이 영화를 만들..

세탁소

"때르르릉"         비교적 조용하던 집안에 전화벨이 울린다.    얼굴에 심술이 가득찬 아내가 방청소를 하다       몹시 기분이 안좋은 듯한 얼굴로 수화기를 든다.         "잘못 걸었어요. 뚝!"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는다. 아마 잘못 걸린 전화인 모양이다.       하지만 잠시후 또 전화벨이 울린다.       조금전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성큼 전화기로 다가간 아내가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 세탁소 아니라니깐요! 딸깍"         그리고 조금전의 그 동작보다 조금 더 단호하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뭔데 그래?"         TV를 보고 있던 내가 물으니 무슨 일..

신용사회, 신용카드

"크리스마스니 큰 애 옷 한 벌은 사줘야지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의 늦은 밤. 아내는 동대문에 옷을 사러가자며 재촉한다. 밤 10시면 어김없이 이부자리를 깔고 잠이 들어야 정상인 아내가 이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서자는 걸 보며 연말의 산만함이 엉뚱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원망스럽기도 했다. 밤에 나가서 쇼핑하는 일이 뭐가 힘드냐만은 그건 얼핏 생각한 경우에 해당하는 기분이고 같이 가야 하는 상대가 마누라고, 아기 옷을 산다고 하지만 분명 자기 옷도 한두 벌 사게되거나 또는 사진 않더라도 둘러보게 마련인데 이 힘든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갈등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가서 짐꾼과 운전기사라는 두 가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인생이 몹시 ..

생일

"여보, 후연이가 이따가 들어올 때 케익 사오래요~"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케익을 먹고 싶다는 후연이 얘기를 꺼낸 점이 어째 심상치 않았다.  "후연이가 왜 갑자기 케익을 먹겠대?"  내 질문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엄마 생일이라고 케익 먹고 싶대~" "......?"     오늘이 아내 생일인가보다. 마누라 생일도 모른다는 단순한 사실은 남들이 볼 때 무척 무심하고 한심한 남자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아내의 생일은 좀 복잡하다. 시골에서 자란 탓에 주민등록 번호는 한참 뒤에 올려져 있고, 그 숫자에 나온 생일은 당연히 실제 생일과 다르며, 실제 생일도 음력으로 계산해야 답이 나오기 때문에 음력에 둔감한 나는 잘 계산하지 못한다. 정확한 날짜만 기억해도 조금은 그 과정이 쉬워지..

권투

“또 울어?” 아내가 큰녀석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큰 녀석은 날 닮았다. 생긴 게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는 짓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연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매우 심약하다는 점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태권도장에 보낸다고 함께 갔었는데 태권도장 입구에서 울면서 도망 온 적이 있었다. 뭐가 그리 무서웠는지 태권도장에 들어가 볼 엄두도 못내고 바로 돌아서서 왔다. 그리고 그 뒤로 바둑두는 기원에 2년이나 다녔다. 매우 지루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태권도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튼 그 뒤로 바둑은 내게 좋은 취미생활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도 가끔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큰아들 후연이도 그런 성격이 가끔 보이기에 조금..

정답

밤늦은 시간, 집에 들어오니 TV에서는 오락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어느 연예인이 출연해서 자기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국에서 제시한 단어를 부인의 입을 통해 나오게 하도록 유도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제시한 단어는 ‘징그러워’였고 출연자는 상대방인 부인에게 이 말이 나오게 하려고 출연자는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끼리 끌어안는 얘기를 꺼내며 부인으로 하여금 ‘징그러워’라는 정답을 유도하려 했는데 정작 그 말은 안나오고 다른 말들만 오갔다. TV 화면 밑에는 자막으로 ‘징그러워’라는 정답이 나와있고 사회자와 출연자는 계속 그 단어가 나오게 하려고 애를 쓰는, 매우 전형적인 쓸데없는 오락 프로그램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열심히 볼 줄 알았던 아내는 언제부터인지 방한쪽 구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