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권투

아하누가 2024. 7. 6. 02:08



“또 울어?”

 

아내가 큰녀석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큰 녀석은 날 닮았다. 

생긴 게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는 짓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연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매우 심약하다는 점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태권도장에 보낸다고 함께 갔었는데 

태권도장 입구에서 울면서 도망 온 적이 있었다. 

뭐가 그리 무서웠는지 태권도장에 들어가 볼 엄두도 못내고 바로 돌아서서 왔다. 

그리고 그 뒤로 바둑두는 기원에 2년이나 다녔다. 

매우 지루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태권도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튼 그 뒤로 바둑은 내게 좋은 취미생활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도 가끔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큰아들 후연이도 그런 성격이 가끔 보이기에 조금 나아지게 하려고 시도한 것이 

얼마전 구입한 권투글러브였다. 

그걸 손에 끼우고 나와 치고 받으면 그나마 조금은 터프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주먹으로 사람을 치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정말 날 닮았다면 나름대로 교육의 목적과 효과를 잘 인식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린 일이 없다. (물론 군대에서의 일은 빼자. 

그뒤로 나도 성질 더러워졌다.) 

하지만 녀석은 권투를 할 때도 그 심약한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조금 더 세게 칠 수도 있고 조금 더 다부지게 할 수도 있는데 

녀석은 언제나 '그 정도'에서 그친다. 

 

사람의 성격은 바꿀 수가 없다. 

오히려 억지로 바꾸려 하다가는 또 다른 정신병만 만들 뿐이다. 

그러니 성격 자체를 바꾸겠다는 의도는 없고 다만 남들보다 심약한 면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려 한다. 

 

 

*          *          *

 

 

간밤에도 녀석하고 권투를 했다. 

조금만 세게 맞으면 금방 우는 표정을 지으며 눈물이 고인다. 

녀석도 타고난 천성이 있으니 그것을 나의 다그침으로 바꿀 수는 없을테지. 

조금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하면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이상한 제안을 한다. 

 

"아빠, 이번엔 엄마랑 아빠랑 해봐!" 

"......!" 

 

그렇다. 녀석이 성격은 심약하지만 효자다. 나는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대한민국의 어느 남편이 마누라하고 권투글러브 끼고 권투를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사랑스런 아들의 바램이며 또한 부탁이니 당연히 들어줘야 한다. 

설령 하기 싫더라도 해야 하는 것이 부모된 도리다. 

그런 부탁 안들어주면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거 재미있겠다는 얼굴과 장난끼 가득한 모습으로 글러브를 끼웠지만 

마음 속으로는 관을 가지고 권투시합에 임했다는 김득구 선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드디어 합법적인 구타와 폭력이 가능한 상황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 * * 

 

"자, 내가 레디 고! 하면 하는거야!" 

 

후연이는 매우 신이 났다. 

자신이 가운데에서 마치 심판인 양 시작 시점을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들의 요망 사항에 따라서 이것이 폭력이나 구타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하는 놀이로서의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고 있었다. 

신이 난 후연이가 시작을 알린다. 

 

"레디~~~" 

 

아직 '고'라는, 실질적인 시작 사인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내 눈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슬픈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 것도 아닌데 눈물이 핑 돌았다. 

이건 반칙이다. 시작 신호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공격을 한다는 건 반칙치고도 

아주 질나쁜 반칙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응징을 하려고 얼른 반격에 들어가려는데 

가운데에 있던 후연이가 큰소리로 말린다. 

 

"내가 레디 고! 하면 하란 말이야!" 

 

매우 억울했지만 아들 앞에서 아빠라도 규칙의 준수를 몸소 보여야 한다고 생각되어 

일단 참았다. 그리고 후연이의 시작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다. 

 

"레디~~" 

 

또 '고!' 소리가 나오기전에 아내의 주먹이 날라왔다. 이번엔 코에 맞았다. 

조금전이 눈물이 핑 돌았다면 이번엔 코끝이 찡했다. 

슬픈 사랑의 추억을 생각한 것도 아닌데 꼬끝이 찡했다. 

그리고 나서 심판이고 아들이고 시작신호고 모든 규칙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으며 

권투를 빙자한 난타전이 시작되었다. 

설마 남자가 어찌 여자를 무지막지하게 주먹으로 때릴 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것은 팔이 가늘고 목도 가는 여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손이 커서 손에 맞는 장갑을 못 사고 270mm 크기의 내 운동화를 신고 조깅하는 여자에게 

그런 논리는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여자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때리기 좋은, 그러나 여자에게는 급소에 해당하는 

신체 부위는 피하고 또한 남에게 드러내야 하는 얼굴 부분도 

화장으로 가려질 만큼만 '가격'을 하기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몇 대 맞고 나니 그것은 평화로운 시절의 배부른 생각이고 

주먹이 오가는 횟수가 많아지고 유효타가 내 얼굴에 적중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그 생각은 요즘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남녀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부부는 서로 엉켜 주먹을 휘두르는 희대의 활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신없는 난타전 속에 아내가 휘두른 그 무시무시한 펀치에 

옆에서 재미있게 구경하던 둘째 아들 의연이가 맞아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부부의 난타전은 중단되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그리고 다음 기회를 벼르면서 부부의 권투시합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우리 부부는 주로 부부싸움을 이런 식으로 한다. 

예전엔 주로 그레꼬로만형 레슬링을 했는데 이제 장비가 생기니 종목도 바뀌는가 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허리 24인치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 * * 

 

옛말이나 또는 옛날 어른들께서는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가려먹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바로 어른들의 행동을 따라한다는 말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뒤로 우리 후연이는 권투를 하는데 매우 과격해졌다. 

그렇다. 내가 바라던게 바로 이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몸을 아끼지 않으며 솔선수범을 보인 부모들의 산교육에서 얻은 

뛰어난 교육 효과다. 

 

이제 후연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태권도장을 보낼 방법을 찾았다. 

녀석은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태권도장에서 울며 돌아서 나오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그전에 아내와 나는 중국무술 영화를 능가하는 치열한 활극을 

한번 더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문제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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