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니 큰 애 옷 한 벌은 사줘야지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의 늦은 밤. 아내는 동대문에 옷을 사러가자며 재촉한다.
밤 10시면 어김없이 이부자리를 깔고 잠이 들어야 정상인 아내가
이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서자는 걸 보며 연말의 산만함이
엉뚱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원망스럽기도 했다.
밤에 나가서 쇼핑하는 일이 뭐가 힘드냐만은 그건 얼핏 생각한 경우에 해당하는 기분이고
같이 가야 하는 상대가 마누라고, 아기 옷을 산다고 하지만 분명 자기 옷도
한두 벌 사게되거나 또는 사진 않더라도 둘러보게 마련인데
이 힘든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갈등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가서 짐꾼과 운전기사라는 두 가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인생이 몹시 힘들어진다는 사실에도 또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우여곡절과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니 막힌 도로에서 반쯤 감겼던 아내의 눈이
제법 빛이 나기 시작한다. 저 눈빛이 파라다이스에서 혼자 자란 17세 소녀의 눈빛처럼
초롱거린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아쉽게도 그 눈빛은 한달간 굶었다가
사자가 먹다 남긴 음식을 쳐다보고 있는 하이에나의 눈빛에 가까웠다.
초롱한 눈빛이 점점 광채를 발하며 아내는 아이 옷을 고르기 시작했고
처음엔 이것저것 무작위로 보고 그 다음엔 분야를 나누어 보고 그리고 또 그 다음엔
한 분야의 대상을 더 좁혀 두어벌의 옷을 고르는,
매우 일반적인 경우의 평범한 과정을 마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시간은 1시간 30분이 경과한 뒤였다. 그러더니 아이 옷 두벌을 두고
매우 심각한 갈등을 하고 있다.
어느 누구든 이런 경우엔 그러하듯 이것도 좋고 저것도 사고 싶은데
두벌을 다 사기엔 경제적인 무리가 있는 상황이 있다.
그러더니 일체의 의견도 제시하지 않고 묵묵히 짐꾼으로서의 소임을 하고 있는
나를 쳐다보더니 특유의 하이에나의 눈빛에 광채를 띄기 시작한다.
"하나는 당신이 사줄래요?"
".....?"
내가 돈이 어딨다고?
나는 그저 운전기사와 짐꾼 역할하기도 벅찬 사람이다.
여기에 경제적 부담까지 지라는 건 차마 말로 표현 못할 가혹한 일이다.
"내가 돈이 어딨다고?"
"신용카드로 사면 되요~"
집안의 돈은 모두 아내가 관리하니 내게는 돈이 없어야 정상이다.
설령 있어도 있다는 말을 못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룰이요 또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욕심이 난 두벌의 옷을 굳이 다 사고 싶었는지
다소 무리하다 싶은 제안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용카드 또한 마찬가지여서 신용카드로 내가 물건을 사면 나중에 내가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는 것일테고 그러면 아내 몰래 내가 꼬불치는 돈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니 이 또한 몹시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게 되는 셈이다.
"신용카드 안 된다니까?"
조심스레 말을 열었더니 아내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바로 대꾸한다.
"어허~ 요즘 신용카드 안 받는 데가 어디 있나요?"
그리고는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싶었는지 4만 5천원짜리 옷을 얼른 현금으로 사더니
둘 중에 조금 더 비싼 6만 3천원짜리 오리털 코트를 파는 데로 데려갔다.
그 짧은 순간에도 물건 값을 기억하여 10원이라도 더 싼 곳을 먼저 찾아
얼른 물건을 사버리는 순발력에 감동하기도 했으나
지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어서 그 작은 감동은 나중에
이불 덮고 혼자서 하기로 하고 얼른 굳은 표정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당연히 되지요~"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냐는 아내의 말에 종업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한다.
얼마전엔 분명히 안된 것 같았는데 그 동안 결제시스템을 바꾼 모양이다.
아내는 옆구리를 찌르며 신용카드를 꺼내라 하고
나는 이제 모든 일이 귀찮아질 것이라는 포기의 손길로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혹시 지갑을 꺼내는 순간에도 성질 급한 아내가 그냥 돈을 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되도록 천천히 지갑을 꺼냈으나 그것은 나의 앙증맞은 생각이었고
아내는 누구보다 흐뭇하고 침착한 자세로 지갑속에서 나오는 신용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모든 일은 복잡해진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나중에 내가 내야 한다는 사실. 그러면 내가 그걸
결제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선례는 만들면 만들수록 나의 손해이므로
어떻게든 피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마 이 시간 이후로 내가 신용카드를 쓰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잠시후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관의 목소리처럼 옷가게 종업원의 말이 들려왔다.
"이 카드 연체중이라 안 되는데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는 아내에게 지갑속에 카드를 다시 주섬주섬 집어넣으며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었다.
"거봐, 내가 안 된다 그랬잖아....."
나 이제 어떻게 사냐.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