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콜라보다 진하다 25

아버지와 아들의 이메일

큰아들 후연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내겐 한 가지 기대가 생겼다.이제 녀석도 한글을 쓰고 읽을 줄 알며 인터넷을 할 줄 알게 되니아빠인 나와 사이좋게 이메일을 교환하는 소박한 바람이었다.하지만 내게는 몹시도 간단할 것만 같은 그 일은초등학교에 갓들어간 녀석에게는 상당히 고난도의 미션이었고,나 역시 당시 상황으로는 만만치 않은개인적인 요구라는 생각에 아쉬움만 가득차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고맙게도 녀석은 남들이 자라는 만큼 쑥쑥 자라주어어느덧 이메일 주소를 만들고 싶다고 제발로 찾아오기에 이르렀다.아빠와 이메일을 교환하며 감성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앙증맞은 발상은 아닐테고,자신이 자주 가는 게임사이트에 드디어 이메일이 필요한 상황에 온 것이다. "이제 이메일 만들었으니 아빠와 매일 편지 주고 ..

태권도

초등학교 1학년일 무렵 엄마 손을 잡고 태권도장을 찾은 적이 있다.그러고 보니 아주 오랜 기억이다.지금의 기억으로는 당시 도장 안에서 사람들이매트 위로 날아다니고 여기저기 엎어져 있었다.맘 약한 내가 선뜻 나서서나도 저렇게 사람들을 집어 던져보겠다고 말했을 리는 없고,단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뒷걸음을 쳤다.훗날 이 사건은 계속되는 어머니의 과장된 기억으로 인해태권도장 앞에서 엉엉 울었다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증되어집안에서 놀림감이 될 경우 자주 등장하는 레파토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태권도장을 포기한 나는 이후 바둑 두는 기원에 다녔고그 곳은 제법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는지어린 나이임에도 한동안 바둑을 열심히 두었다.세월이 하염없이 지나 나의 큰 아들이 그때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내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

개근 교육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이사가 잦아 전학가는 일이 많았다.전학을 가려면 적어도 10일 이상은 학교에 못가고 집에서 놀아야 하기 때문에그 재미에 그 귀찮은 몇 가지 일들이 제법 할 만한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었다.그러다가 4학년이 되면서 이사갈 일도 없어지니 딱히 학교를 가지 않을 이유도덩달아 없어지게 되었다.그래서 늘 숙제 안한 날이라던가 지각할 것 같은 날,심지어 잠을 더 자고 싶은 날 아침이면 어머니께 학교가지 않겠다고소주 2병을 나발분 옆집 선배처럼 꼬장을 부리곤 했다.하지만 그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어머니는 한마디로 단호하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가지 마~” 학교 안 가겠다고 엄마에게 꼬장부리는 일은 내게 있어 너무도 쉬운 일이었고그 꼬장이 엄마에게 먹혀들어가는 일은 더더욱 쉬운 일이어서학교에 가..

테트리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모두 인천 월미도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1박 2일은 아니었고 그저 바닷바람 맞으면서 횟집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는가벼운 의도로 토요일 업무를 마치고 월미도에 갔던 것이다.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주위는 아직도 훤한 시간이어서 벌써부터 술집에 앉아술을 마시기도 적장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여러 명이 하릴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한두 명이 오락실을 찾아가고 있었고그러다보니 나머지 인원들도 하나 둘씩 그 오락실로 들어가전자오락을 하게 되었다.급기야 밖에서 뿔뿔이 흩어진 직원들을 찾아다니던 부장님도그 오락실에 오게 되었는데…….  부장님은 테트리스에 열중하던 직원 뒤에 선 채무척이나 재미있는 듯한 표정으로 테트리스라는 오락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더니 나중에는 신이 나는지 ‘왼쪽으로..

산보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산보나 가자며늦은 밤인데도 나와 내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셨다. 물론 여름철이다.그저 뒷산에 올라가 돗자리 대용으로 쓰이던 이불 또는 포대기를 가져와아무렇게나 깔아두고 누워서 별을 보거나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이 산보의 주요 일정이었다.  산보....이 단어가 지금도 살아서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지는 모르겠지만아무튼 아버지는 그런 것을 산보라 하셨다.내려올 무렵이면 두 동생 중 한 놈은 이미 잠들어 아버지 등에 업혀 있었고나는 언제나 내 발로 걸어서 산길을 내려오곤 했다.이후 동생은 등에 무언가 닿으면 잠에 빠지는 특수체질로 변화하기 시작했고,아버지 따라 산보가기 좋아하던 나는 군에 입대하여 경비중대에 근무하며하루에도 몇번씩 산보 아닌 산보를 하게 되었다.아버지 또한 그 뒤로 지..

누룽지

왜 그랬는지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겠지만어린시절엔 누룽지에 물을 잔뜩 넣고 끓인,숭늉도 아니고 밥도 아닌 마치 죽처럼 생긴 밥을 자주 먹었다.요즘이야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면 누룽지도 안나온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집에서 누룽지를 끓여서 먹은 기억이 전혀없다.하지만 당시 쌀이 부족해서 생긴 이 가슴 아픈 현실을 전혀 알 리가 없는 어린 나와더 어린 동생들은 그런 누룽지를 어른들의 생각과는 달리 불평은커녕제법 맛있게 먹곤 했으며, 심지어 별식 삼아 가끔씩 밥솥 밑에 잔뜩 붙어 있는누룽지를 보며 우리들끼리 물을 붓고 끓여 먹기도 했었다.다만 그 모습을 보며 늘 가슴 아파하시던 분은 다름아닌 어머니셨는데그것이 왜 가슴이 아파야 하는 일인지 어린 우리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또한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

문제와 답

신세대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화제가 되고 있을 무렵이었다.신세대라는 용어는 당시 20세 전후한 젊은 사람을일부 기성 세대와 구분하기 위한 말로,젊은이들의 재기발랄함은 뒤로 한 채예의없고 이기적인 뉘앙스를 짙게 풍긴 말이었다.하지만 그말은 매스컴의 영향으로당시에는 가장 중요한 화제의 키워드가 되었고따라서 이에 대한 농담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 말이 중요한 단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어느날.학교에서 돌아온 대학생 막내 동생이이미 직장생활을 하며 경제인구의 한사람으로자리잡고 있던 내게 말을 건넸다.  “형, 형은 ‘멀리~’로 시작하는 노래하면 무슨 노래가 생각나?”“......?”  질문을 던진 당사자인 막내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소 닭보듯 잠시 쳐다봤다.나중에 알게 된 ..

특이체질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 수영장에 자주 갔다.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는 실내수영장이라는 단어 자체가몹시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의 특이한 교육방식으로 인해수영장 가는데는 어떠한 방해세력이나 외부의 압력 등별다른 곤란함 없이 편하게 갈 수 있었다.다른 어머니와 달리 나의 어머니는 남자가 살아가며 꼭 해야 하는 것을두가지 지목하셨는데 다름 아닌 바둑과 수영이었다.정신도 맑게 하고 몸도 튼튼해지라는 교육 목적인지 아니면어디가서 머리 나쁘다는 소리 듣지 말라는 동시에물에 빠져 죽지 않도록 하시겠다는생존 개념을 가르치려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영장엔 잘 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가기 싫은 기원에 억지로 가야 했으나중학생이 되어 수영장에 가니 재미도 있고 친구들 하고 어울리는 맛도 있어매주, 아주,..

단순 반복의 오묘한 즐거움

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집에 들어오니 여동생과 남동생이 사이좋게 마주 앉아무언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놀고 있었다.가만히 들여다보니 손에는 감이 쥐어져 있었는데한사람이 손에 쥐고 다른 사람에게손안에 있는 것을 만져보라고 하고는 서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감 잡혀?”“아니, 잘 안 잡혀”“자, 이제 감 잡혀?”“응, 감 잡았어”“이번엔 니가 할 차례야”  그리고 각자 역할을 바꾸어또 다시 그 대화 및 이에 상응한 액션을 반복하고 있었다.아무리 동생들이라고 해도 이때 나이가 이미 20대를 넘어선 나이었으니어린애들 장난도 아닐텐데 그렇게 놀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정말 놀구들 있네...”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툭 내뱉으니동생들은 나보다 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

복권

얼마전 막내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미국에 갔다.피는 콜라보다 진하다의 글에 과 등많은 소재를 제공해주었던 바로 그 동생이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식구들 모두가 미국에 살고 있어서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 10년도 훨씬 넘은 일이었다.그동안 시카고에서, 아이오와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분당에서각각 일부분의 식구들이 모인 적은 수시로 있었지만이렇게 대규모적이며 총동원적으로 모인 일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해후를 하고이런저런 얘기들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그러던 중 막내가 어디선가 들었는지 뭐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듯흥분하며 떠들어댔다.  “형! 이번주 복권 당첨자가 없어서 다음주 당첨금이 300만불로 올랐대...”  300만불?처음에는 300만원으로 들어서 참 미국치고는복권당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