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일 무렵 엄마 손을 잡고 태권도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랜 기억이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당시 도장 안에서 사람들이
매트 위로 날아다니고 여기저기 엎어져 있었다.
맘 약한 내가 선뜻 나서서
나도 저렇게 사람들을 집어 던져보겠다고 말했을 리는 없고,
단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뒷걸음을 쳤다.
훗날 이 사건은 계속되는 어머니의 과장된 기억으로 인해
태권도장 앞에서 엉엉 울었다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증되어
집안에서 놀림감이 될 경우 자주 등장하는 레파토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태권도장을 포기한 나는 이후 바둑 두는 기원에 다녔고
그 곳은 제법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는지
어린 나이임에도 한동안 바둑을 열심히 두었다.
세월이 하염없이 지나 나의 큰 아들이 그때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
내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큰 아들 후연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태권도장에 갔다.
자라는 습성이나 하는 짓을 놓고 면밀히 검토했을 때
녀석 또한 그 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뒷걸음질을 치거나 또는 정말 나의 어머니 기억대로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어야 했다.
그런데 녀석은 별로 무섭거나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던지 쉽게 적응했고
그 이후로도 별 불만 없이 태권도장을 잘 다녔다.
물론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타고난 성격이 다를 수 있다.
또한 시대적 상화의 변화로 인해
태권도장에 가기 전에 이미 TV를 통해서 눈에 익었으니
나보다 쉽게 접할 수도 있는 일이다.
녀석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얀 띠에서 노란 띠로,
그리고 파란 띠 녹색 띠를 거쳐 빨간 띠를 허리에 두르고 다녔고
드디어 국기원에서 실시하는 승단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은 ‘단’이라 칭하지 않고 ‘품’이라 칭하며,
검은 띠가 아닌 빨간색과 검은색이 반반씩 나누어진 띠를 착용한다.)
아침부터 서둘러 국기원에 도착하니
이미 태권도장 자동차로 먼저 자리잡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 심사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낯선 모습이 보인다.
체육관 한쪽 구석에선 후연이 만한 아이들이
머리에 보호대를 쓰고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 심사라 단순히 발차기나 품새 심사만 할 줄 알았는데
겨루기가 있다니 다소 놀라웠고,
또 한 가지 걱정은 과연 저 녀석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싸움’에
울지 않고 잘 견딜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람도 많은데 안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거나
겨루기에 나서서 한 대 얻어맞고 자리에 앉아 울어버린다면
그것도 눈앞이 깜깜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씩 긴장되었다. 망신이나 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어느 새 후연이 차례가 되었다.
머리에 쓴 보호모자가 커서 뭔가 어색하다. 녀석의 얼굴도 잔뜩 긴장되어 있다.
겨루기 차례가 되어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사인이 나오자
녀석은 나의 생각과 달리 용감하게 앞으로 달려가
상대에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같은 학년이라는데 덩치가 훨씬 컸고 발차기의 파괴력도 막강했다.
그 상대는 강한 파워를 앞세워
연신 같은 자세의 발차기만 시도하는 데에 비해
후연이는 배운 대로 앞차기와 돌려차기,
그리고 이단차기를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판이 잠깐 경기를 중단시키는 사이
상대의 발차기에 배를 한 대 맞아 연신 배를 쓰다듬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다.
하지만 용하게도 주어진 시간을 잘 버텼다.
대견하다.
* * *
아이들은 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행여 그 성장과정의 기준이 나의 그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의 능력이 가능한 나이로 성장하는 녀석을 볼 때
자꾸 나의 어린시절과 비교하게 된다.
내 아이지만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녀석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을 게다.
그저 단지 그것을 지켜보고 인정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일 게다.
이미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되어 있다.
아하누가
중학생이 되어 권투도장에 보냈을 때, 녀석은 결국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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