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콜라보다 진하다 25

도시락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도시락이라는 것을 가방에 넣고 학교에 가게 되었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도시락이라는 것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고, 또한 나이가 먹어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것이기도 했다. 당시 형편으로는 보리가 잔뜩 섞인 밥에 김치 한 조각 들어 있는 것이 도시락이라는 실체의 전부였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러했기에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도시락이 있어서 하루가 뿌듯했고 즐거웠을 뿐이다. 그것이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채 말이다. 그날은 어머니가 아침부터 바쁘셔서 도시락을 가져갈 수 없었다. 칭얼거리는 나를 타이르시던 어머니는 점심 식사 시간 전에 학교에 가져다 줄테니 걱정 ..

교육 제도

벌써 10시간이 넘었다.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는 아직도 어딘지도 모를 하늘 한복판을 맴돌고 있다. 막내 동생은 좁은 비행기 좌석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잠에 푹 빠져 있다. 하긴 이 녀석이 어린 시절에는 어딘가에 등만 닿았다 싶으면 잠에 빠져들곤 해서 한때 우리가 불렀던 별명이 ‘본능아’였으니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긴 했다. 등을 힘껏 젖히고 나니 한국에 남은 마지막 남은 핏줄인 막내 동생마저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식구들이 미국에 살고 있으니 미국에 가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군대를 마치고 대학까지 졸업한 적잖은 나이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과정을 생각하니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미 가정이 있는 내 경우는 이민을 가기가 ..

피아노

조금은 오래 전 일이다. 모처럼의 일요일.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과제물을 하려고 아무 약속도 하지 않고 집에서 꾸물대고 있었다. 어차피 하기로 한 일이니 만큼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열심히 닦고 있는데 어머니가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그것이 네 칫솔이냐고 물으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를 닦다 말고 닦던 칫솔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내 칫솔이 아닐 이유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원래 이를 우악스럽고도 혈기왕성하게 닦기 때문에 다른 식구들 것보다 솔 부분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어 구분이 아주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능적인 잔머리의 대가인 나는 순수한 자신의 실수로 연못에 도끼를 빠뜨리고는 세금 한푼 내지 않고 금도끼, 은도끼를 모두 챙긴 나무꾼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아끼는 나무를 베어 버리고는 싸가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놀이

내가 지금의 우리 큰아들 후연이만 했을 때 아버지께서 아침마다 이불을 개어주셨다. 아버지가 이불을 개어주실 때마다 여동생과 함께 이불 끝 자락에 매달려 아버지가 들어올리는 이불의 각도와 만유인력의 원리를 이용하여 이불에서 굴러 떨어지는 장난을 놀이터 미끄럼틀 보다 재미있어 했다. 미끄럼틀이야 고정된 시설에서 능동적으로 시도해야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것에 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올리는 이불에 매달리는 것은 미끄럼틀이 통째로 움직이는 것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놀이동산의 '바이킹'과 흡사한 원리였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이 놀이를 개발한 나는 몹시 흥에 겨워 아침에 잠에서 깨는 일이 매우 즐겁게 느껴졌다. 같이 뒹굴던 여동생이야 용어는 몰라도 높은 곳에 올라가면 떨어진다는 만유인력의 원리 정도는 아는 나이였으..

효도

어느 일요일, 아버지께서는 몸담고 계시는 어떤 모임에서 열리는 등산대회에 가신다며 나와 같이 갈 것을 제안하셨다. 많은 어르신들하고 같이 있다는 게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리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또 이 기회에 효도라도 한번 해야겠다며 순순히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최종 목적지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등산코스로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끔 오르던, 젊은 사람들에겐 산책 정도 되는 그리 높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그곳을 찾으니 그 전의 그곳보다는 한참이나 높게만 느껴질 정도로 힘들게 올라가야만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가뿐 숨을 고르며 잠시 쉬는데 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어르신들이 무언가 곤란한 일이 생긴 듯했고, 의견을 주고 받으시던 얘기중에 아버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리 아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