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콜라보다 진하다

피아노

아하누가 2024. 2. 21. 20:05

 

조금은 오래 전 일이다.

모처럼의 일요일.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과제물을 하려고 아무 약속도 하지 않고
집에서 꾸물대고 있었다.
어차피 하기로 한 일이니 만큼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열심히 닦고 있는데
어머니가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그것이 네 칫솔이냐고 물으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를 닦다 말고 닦던 칫솔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내 칫솔이 아닐 이유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원래 이를 우악스럽고도 혈기왕성하게 닦기 때문에 다른 식구들 것보다
솔 부분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어 구분이 아주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능적인 잔머리의 대가인 나는

순수한 자신의 실수로 연못에 도끼를 빠뜨리고는
세금 한푼 내지 않고 금도끼, 은도끼를 모두 챙긴 나무꾼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아끼는 나무를 베어 버리고는

싸가지 없게 자수하고서도 칭찬받았다는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일화를

그 찰나의 틈에서 생각해내곤
혹시나 솔직하게 대답하면 경제적인 이익이나 또는
이에 상응하는 기타 유흥비라도 나올까 봐 당당한 말투로 내 것이라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어머니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셨다.
별 말씀이 없으시기에 오히려 잠시나마 가졌던 파렴치한 생각이

창피함으로 이어졌고 그 창피함은 심한 자책감으로 이어졌으며

또한 그 자책감은 신경질로 나타났다.

이를 다 닦고 어머님께 왜 그걸 내게 물어 보셨냐고 따지듯 물었다.
어머니는 귀찮다는 듯이 그냥 한 번 물어 봤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그냥 한 번 물어 봤어’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지고
‘그냥 한 번 불러 봤어’라는 노래 가사가 널리 알려진 것은
물론 시간이 한참 흐른 훗날의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창피함이 지나쳐 자존심까지 상하고 있는데
어머니의 대답마저 신통치 않으니 더욱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근데 왜 물어봤어? 왜 물어 봤냐고……?’를 외치다 외치다 지칠 무렵
어머니는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내게 말씀하셨다.

 

 

 “응, 그거……. 버리는 칫솔인 줄 알고 운동화 빨았거든.”

 

 

난 느꼈다.
이를 닦는다고 반드시 개운한 것만은 아니라고.

 

 

 

*     *     *

 

 


학교에 제출할 과제를 해야 하는데 그 일이 만만치 않다.
당시 디자인을 전공하던 내가 정밀 묘사를 위해 필요했던 사진은

피아노였는데
선명하게 잘 나온 피아노 사진을 구하기가 쉽잖은 일이라
시작부터 일이 잘 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아노 사진을 찾다가 그 일이 쉽게 풀리지 않자 곧 지쳐버렸다.

지치면 짜증난다.
짜증나면 그 원인이 되었음직한 핑계를 찾게 된다.

결국 어머니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이 모든 것이 다 시작을 개운치 못하게 한 어머니 때문이야.’

 

어머니를 윽박지르다시피 해서 피아노 사진을 구해오라고 떼를 썼다.
왜 피아노 사진을 구해야 하는지 모르시는 어머니는

사진을 구해보겠다시며
평소 잘 알고 지내시던 동네의 한 문방구에 가셨다.
하지만 어머니가 구해 오신 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피아노 사진이 아니라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소피마르소’ 하고

 ‘피비케이츠’ 사진이었다.
신경질을 내면서 사진을 집어 던지며

왜 필요한 걸 안 구해주고 이런 걸 가져왔느냐며
따졌더니 어머니는 이해 못할 표정을 하시고 내게 말씀하신다.

 

 

 “저번에 네 가방 열어보니 다 재네들 사진밖에 없더구나.”
 “…….”

 

 

약관의 혈기왕성하고 예민한 감성을 지닌 나이에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바지가 반쯤 내려가야 창피하지 다 내려간 다음엔
창피한 것도 없게 마련이다.
더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를 향해 갖가지 오도방정을 떨었다.
물론 그런 혼란의 틈에도

바닥에 떨어진 그 사진들을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다행히 얼마쯤 지난 뒤 한 잡지에 실린 모 회사의 피아노 광고에서
좋은 피아노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방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오시더니

나를 힐끔 보시고는
이제야 피아노 사진의 용도를 이해하셨는지 고개를 끄덕이신다.
잔뜩 화가 나서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 어머니는 멋적은 듯 슬그머니 나가신다.
‘피아노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치는 건데……’라는 한 마디를 잊지 않으신 채.
도대체 우리 어머니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는 자식 일이라면 내 일처럼 뛰어다니시는데

우리 어머니는 전혀 관심 밖이다.

내 능력을 믿고 계시는 건지 아니면 어렸을 때 들었던
충격적인 얘기처럼 내가 주워온 자식이 아닌지 모르겠다.
다행히 그 피아노 사진은 멋진 작품이 되어 과제물로 제출되고
한 학기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           *           *

 

 


시간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버려 어느덧 2학기도 끝나고 있었다.
하루는 아무런 약속도 아무런 갈 곳도 없는 처량한 처지가 되어

일찍 집에 왔더니 책상 위에 무언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들쳐보니 한 장도 아니고 열 장도 아닌 무려 300장이 넘는

피아노 사진이 있었다.
무려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어머니께서 한장 두장 모으신 사진이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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