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021

초코파이, 우유 그리고 오징어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밤 9시 뉴스가 끝날 즈음이었지만 무언가 반드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밤 12시가 넘어서였다.저녁식사를 대충 마쳤더니 약간의 허기가 있었는데 밤늦은 시간에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러워 억지로 참고 있다가 12시가 넘어서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곤히 자고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뭐 먹을 거 없나?" 아내는 이상한 말을 남기고 자던 잠을 계속 자고 있다. 아니, 잠에서 깨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럴 때 깨워봐야 밥상이 나오진 않는다. 밥상이 날아오면 모를까. 냉장고문을 열어 먹을 만한 음식을 꺼내보았다.초코파이 2개, 우유 그리고 오징어.....오징어는 평범한 오징어가 아니라 여름 휴가 때 강릉에서 사온 ..

마취

어느 날 아침 양치질을 하는데 이가 시큰거린다. 입을 잔뜩 벌려 거울에 들여다보니 그전부터 썩어가던 송곳니 윗부분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아니, 까맣게 변한 것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고 이가 시큰거리니 그 까만 부분이 더 진하고 크게 보인 것일 뿐이다. 오래 전에 그것 때문에 치과를 찾았지만 환자가 많아 오후에 오라는 간호사의 말을 아직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는 하늘의 뜻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다. 이왕 머리 속에서 치과를 생각해내고 또 치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한번 상상했으니 이러한 아름답지 않은 상상이 두 번 반복되지 않도록 내친김에 치과를 찾았다.    "모르셨어요?"  치과의사는 왼쪽 송곳니 윗부분만 썩은 게 아니라 오른쪽 송곳니의 똑같은 부위도 마찬가지로 썩었다며 커다란 ..

상식의 함정

요즘은 한풀 꺾이긴 했지만 얼마전만 해도 채팅에 푹 빠져 지냈다. 이제는 졸업했음직도 한 채팅을 또 하게 된 것은 새로운 재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라 외국 사이트에 들어가 영어로 채팅을 하는 건데 꽤 재미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 재미있어 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안 통하는데 채팅을 하니 그게 재미있어서 매일 하곤 했다. 말로 하는 대화와는 또 달라 대화중에 사전을 찾아 볼 수도 있고(사전을 펼치는 게 아니라 영어사전 사이트를 하나 더 열어둔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 그냥 대답을 하지 않으면 되니 이 또한 부담 없다. 그렇게 외국인과 채팅을 하고 있으면 우리식으로 1:1 대화신청이 오곤 한다. 그러면 둘이서만 대화를 하게 되는 창이 열리는데.... 그런 대화를 하는 사람중에 많은 사람들이 hi..

BODY WASH, 그것이 알고 싶다!

밤에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려고 욕실 바닥을 두리번거리다 DOVE 사에서 나온 Body Wash 라고 쓰인 커다란 플라스틱 병이 눈에 띄였다. BODY WASH -이것은 지난 2월에 미국에서 내가 사온 것이다. 천장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어느 커다란 대형 할인 매장에서 발견한 것이다. 원래 욕실 용품이나 기타 화장품과 관련된 제품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지만 그래도 DOVE라는 브랜드는 알고 있다. 순백색 바탕에 언제나 깔끔하게 디자인된 포장이 기억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기업이나 브랜드의 이미지가 중요한 모양이다. 그와 비슷한 사례로 NIVEA라는 브랜드도 같은 느낌으로 내 머리속에 남아 있는 걸 보니 하는 짓은 지저분한 놈이 깔끔한 것은 매우 좋아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DO..

좋아하는 음식, 즐겨먹는 음식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듣고 이에 대답을 할 때는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에 오간다. 말 그대로 좋아하는 음식에는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도 있고 입맛에 맛는 음식일 경우도 있다. 그런가하면 오래전에 가졌던 맛의 기억이 떠오른 음식이 좋아하는 음식이 될 수도 있고 최근의 입맛으로 인해 갑작스레 좋아진 음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주변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공식적인 자리나 또는 취재 등의 인터뷰라면 이 경우에 있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것은 그 범위가 매우 좁아진다. 이때 좋아하는 음식이란 평소에 즐겨먹는 경우보다 입맛에 맞지만 자주 못먹는 음식을 말하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다. 아니, 보통의 상식이 아니라면 최소한 내 생각은 그렇다.        *          *          *  ..

민방위 대원의 달리기

어느날 새벽 민방위 훈련이 있었다. 6시부터 시작인 훈련시간이 남들과 라이프 사이클이 다른 내게는 엄청나게 이른 시각이다. 아니, 아직 한밤중에 훈련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상당히 불쾌하지만 이미 한번 빼먹은 일도 있고, 이번에 안가면 정말 바쁠 때 훈련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새벽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훈련 시작 시간은 오전 6시. 그러나 그것은 문서상의 시간일 뿐 현실적으로 대략 6시 30분까지 가도 훈련 참가 여부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영악한 민방위 대원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훈련이라고 해야 학교운동장에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국가 한번 부르고 간단한 연설 듣고 소집통지서에 도장 받아오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 그 훈련 아닌 훈련은 단지 참석의 확인 여..

아침 엄마, 아침 마누라

아침이면 나는 언제나 엄마가 된다. 아이들이 잠에서 깨기 전에 출근하는 아내와 바이오 리듬이 남과 다른 나의 환상적 조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나는 아침이면 엄마가 된다. 물론 위층에 사는 장모님이 나보다 엄마 역할을 훨씬 많이 하시지만 나이로 보나 혈연 관계로 보나 엄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은 분명히 나다.  어느날 아침엔 장모님이 봄나들이 가셔서 아이 둘을 챙겼다. 아이 둘 챙기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숨이 나오고 짜증이 나서 간절히 빌었다. 낮에 도와주는 마누라 한 사람 보내달라고. 그리고 생각해보니 어쩌면 하늘에서 나의 이러한 사정을 갸륵하게 여겨 천사를 보내 낮에 필요한 마누라를 하나 보내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진 이유는 혹시 정..

차멀미

간밤엔 늦은 시간까지 일하느라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면 대중교통이 없으니 당연히 택시를 타고 가야한다. 몹시 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한가지 나의 특이한 체질은 이렇게 흔한 상황에도 많은 생각거리를 남겨준다.   * * *   나는 차멀미를 한다. 시골 출신도 아니고 차를 많이 타지 않은 사람도 아닌데 약간은 촌스러운 차멀미를 한다. 비행기 멀미나 배멀미라면 상대적으로 조금 세련되어 보일 텐데 하필이면 차멀미다.  예전에는 괜찮았는데 군에서 제대하고 집 앞에 지하철이 생겨 지하철을 이용하다보니 이상하게도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하게 된다. 택시는 버스에 비해 흔들림이 없어 비교적 덜하지만 늦은 시간에 피곤한 채 택시를 탄다거나 또는 조금 지저분한 택시를 만나면 예의 그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잔인한 4월의 일요일

언제나 그러하듯 일요일 아침이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 그런데 그 평범한 일정 가운데 커다란 사고가 생겼다.  후반전에 들어서서 경기가 한참 박진감을 더해갈 무렵 우리편 선수가 상대편 골문을 향해 강하게 슈팅한 공이 내 몸에 맞았다. 그 녀석은 우리 편 선수 중에서도 강한 슈팅으로 유명한 놈이다. 몸이라 해도 여기저기 다양한 부위가 있는데 하필이면 여자에겐 없는, 남자에게는 무척 중요한 신체의 특정 부위에 정확히 맞은 것이다.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이 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하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비로 인해 흥건히 젖어있는 운동장에 엎드려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다. 이 정도의 고통과 정신상태라면 거의 기절 수준이다. 주변으로..

문학으로의 갈등

글을 쓰는 솜씨가 남보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관심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매번 글을 쓰고 나서 느끼는 것은 바로 문학이라는 단어와의 갈등이다. 내가 좋아서 쓰는 글이라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은 문학의 기준으로 볼 때 과연 무엇인지 늘 궁금해지곤 한다.   한편으로는 '감히' 문학의 이름으로 내가 쓰는 조잡한 글을 접근시킬 수는 없고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은 단지 '낙서'밖에 되지 않으니 쓰면서도 왠지 고민거리가 되더라는 얘기다. 어차피 스스로의 감성과 정신적 만족을 위해 쓰는 글이니 낙서면 어떻고 문학이면 또 어떠랴 생각은 하지만 그런 생각의 끝은 오히려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어져 그 생각을 꺼낼 때마다 늘 개운치가 않다. 그렇다고 기존의 작가들처럼 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