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한풀 꺾이긴 했지만 얼마전만 해도 채팅에 푹 빠져 지냈다.
이제는 졸업했음직도 한 채팅을 또 하게 된 것은 새로운 재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라 외국 사이트에 들어가 영어로 채팅을 하는 건데 꽤 재미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 재미있어 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안 통하는데 채팅을 하니
그게 재미있어서 매일 하곤 했다.
말로 하는 대화와는 또 달라 대화중에 사전을 찾아 볼 수도 있고(사전을 펼치는 게 아니라
영어사전 사이트를 하나 더 열어둔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
그냥 대답을 하지 않으면 되니 이 또한 부담 없다.
그렇게 외국인과 채팅을 하고 있으면 우리식으로 1:1 대화신청이 오곤 한다.
그러면 둘이서만 대화를 하게 되는 창이 열리는데....
그런 대화를 하는 사람중에 많은 사람들이 hi나 hello 다음에 다짜고짜 성별부터 묻는다.
처음에는 곧잘 대답했지만 그것도 한두번 당하니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라
요즘에는 못하는 영어로 '너 먼저 말해봐!'라고 한다.
그럼 대부분 대답을 하는데 내가 자주 가는 아시안 카페에서는
대부분 그런 놈들은 파키스탄이나 인도 남자들이다.
그러면 나는 항상 <49 / China> 라고 말하는데(혹시나 국가 이미지에 손상을 입힐까봐)
대부분 bye 하고 가버린다.
물론 얼굴도 안보이고 만나기도 힘든 머나먼 곳에서 나누는 대화지만
동성이 아닌 이성과의 대화가 더 야릇하고 정감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다짜고짜 성별부터 묻는 것은 짜증스러운 일이다.
그러던 어느날은 어떤 사람이 대화를 신청했다.
인사말 몇 마디를 나누더니 내게 남자냐 여자냐를 묻는다.
이 녀석은 제법 연구가 있었던지 다짜고짜 묻지 않고
다른 얘기를 조금 하다가 둘러대듯 묻는다.
묻는 방법도 다른 사람하고 달리 조금 특이하게 물었다.
대부분 성별이나 기타 신상에 대해 물을 때 그곳에서는 이런 표현을 한다.
a/s/l plz
나도 처음엔 몹시 당황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저 알파벳은 이런 의미였다.
age/sex/location please
그리곤 나도 장난기가 발동해서 한번은 이렇게 대답했다.
37(서양식으로 나이를 계산했음), 4/week, Seoul
그랬더니 그게 뭐냐고 묻는다.
짜식, 아무리 한국식 유머라지만 대충 보면 웃을 줄도 알아야지 그걸 물어보면 어쩌냐.
그런 대답을 했으면 적어도 'wow!' 정도로 답해야 분위기도 부드러워지는 거 아니겠어?
이렇듯 대부분 사람들이 성별을 물을 때 그런 표현을 하는데
오늘 그 녀석은 매우 특이하게 질문을 한 것이다.
Are you boy or girl?
저 질문을 보니 성별을 묻는 것은 확실한데 막상 대답을 하려니
적당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질문에 충실한 대답을 한다는 것이 이런 문장이 되고 말았다.
"I am a boy!"
아..... 이게 얼마만에 보는 문장인가?
나는 중학교 일학년이 되어 영어를 처음 배우면서 알게 된 저 문장이
이렇게 실전에 쓰이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 일학년의 순진한 학생의 잔대가리로도 저 문장은 학습을 위한 형식의 대명사로
생각했는데 이 문장이 내가 외국인과 대화를 하면서(비록 채팅이지만)
직접 쓰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답을 하고도 스스로 놀라서 하루종일 그 생각만 떠올라
미친놈처럼 혼자서 히죽히죽 웃어댔더니 주변에서 애인 생겼냐고 묻는다.
* * *
너무도 당연한 것을 우리는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가볍게 여긴다.
어렵고 복잡한 것보다는 쉽고 편한 것이 더 좋은 것임이 분명한데도
우리는 되도록 어렵고 복잡한 것을 찾는다.
단지 쉽고 흔한 이유로 소홀해지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실례인 것만 같다.
나는 세상에서 사과라는 과일이 가장 맛있고 가치있는 과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사과라는 과일이 우리나라에서 조금만 열리는 과일이라고 상상해보면
그 희소성은 맛이 좋은 사과의 경쟁력으로 볼 때
아마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찾게 될 것이다.
단지 흔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치마저 평범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못내 안타깝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I am a boy 라는 문장으로 내 의사를 표현한 날.
아주 쉬운 것, 매우 평범한 것,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쉽고 평범하고 편안한 것이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표현도 이미 평범해져 버렸다.
평범해진 그 말도 오늘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분명 내 주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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