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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때르르르릉~”   굉음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모처럼 늦잠에 빠진 휴일 아침의 나를 깨웠다.받을까 생각하다가 잠에서 깨는 것이 아까워일단 인내력으로 기다리기로 했다.계속 울리는 걸 보니 아내가 목욕탕에 다녀오겠다는꿈결 속의 얘기가 현실이었나 보다. 벨은 나의 의지를 시험이라도 하듯 계속 울린다.지난번에 24번까지 버틴 적이 있었지. 그땐 정말 사투에 가까운인내력이 필요했었지…….그때 일을 생각하고 벨소리의 횟수를 세면서 버티고 있으려니어느덧 벨 소리는 20회를 넘기고 있었다.아! 드디어 5년 만에 신기록이 작성되는 순간이다.신기록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늘 격정적이다.칼 루이스는 이 기분 잘 알 게다.아무튼 어느 놈인지 모르지만 너도 참 대단한 놈이다.  “아니! 여보세요! 차를 그렇게 주차하면 어떻게 영..

변태

“여보! 나 팬티하고 러닝셔츠 좀 줘!”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문득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않은 사실을 생각해 내고는밖에 있는 아내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아내는 몹시도 귀찮다는 듯이 욕실로 손을 쑥 내밀어 속옷을 건네 주며계속 투덜거린다.늘 그랬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아내의 투덜거림을 애써 무시한 채새 속옷으로 갈아 입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에 거울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랐다.팬티는 내 것이 맞는데 런닝셔츠는 아내 것을 입고 있는 것이다.아내가 잘못 건네준 모양이다. ‘거참 ~ 희안하게 생겼구만…….’ 이리봐도 저리봐도 참 우습다. 몸에 찰싹 붙는 것이 몹시도 움직임에 어색하다.아내가 이렇게 날씬했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론 역시 제 몸에 맞아야비로소 옷이라는 옛 말도 생각났다.물론 옷이 날개라..

보신탕

“아버님, 저도 먹어도 될까요?”   몇 해 전 여름. 미국에서 오신 아버님께서 가장 급하게 찾으신 음식은다름 아닌 보신탕이었다.미국에서도 없는 음식 없이 잘 지내시지만유일하게 못 드시는 음식이 하나 있다니 그것이 바로 보신탕이다.  출산일이 다가옴에 따라 배가 남산만해진 아내는 계속 보신탕을 쳐다보고군침을 흘리며 마치 고민 상담을 하러 온 의뢰인처럼시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평소에 즐겨먹는 음식이지만 아기를 가지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주변 어른들의 얘기가 못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다.주변에서 뭐라 하든, 또는 그 어떤 징크스에도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먹으려무나.” 아버님은 별 것을 가지고 고민한다는 말투로 말씀하셨다.아내는 몇 번..

홀아비

“아~ 그럼 아기 엄마가 계시긴 계시군요”   아들 후연이 진찰 때문에 찾은 병원 안내 창구의 간호사가 낼모레 또 오라기에아마 내일 모레는 아내가 올 것이라 했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살다보면 참 어이가 없는 일이 가끔 있다.지금의 이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여서이럴 땐 참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곤 한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도 갈만한 상황이기도 했다.병원에 갈 때마다 아내보다 조금 늦게 출근하는 내가 아기를 데리고 갔으니병원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어쩌면 지나친 생각은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진찰실로 들어가니 그날따라 의사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혹시 이 양반도 나를 홀아비로 알고 있남?’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아기가 주사 맞을 때쯤 자연스럽게 물어보려다침대 위에 의..

다이어트

“아니? 저녁 안 먹고 뭐 하는 거야?”    요즘은 아들 녀석이 제법 잘 놀아서  이제야 진짜 아빠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가끔 입이 심심할까 봐 간식삼아 새우깡을 주곤 하는데,  이 새우깡이란 것이 광고 그대로 애나 어른이나 심심풀이에는 최고인 모양이다.  녀석은 어른 못잖게 새우깡을 먹는데 가끔 자기가 먹기 싫을 때는  들고 있던 새우깡을 나에게 먹여주곤 한다. 나쁜 녀석…….  그래도 자식이라 반가운 척하며 해괴망측한 동물 소리를 내며 받아먹곤 하는데,  받아문 새우깡을 입에 넣지 않고 끝이 삐죽 나오게 물고 있으면  녀석이 와서 손가락으로 끝 부분을 수직으로 눌러 입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또 새 것을 가져와 내 입에 물리고 나는 또 반쯤 내밀면  녀석은 또 손가락으로 끝을..

미운 오리새끼

“야~ 지겹지도 않니? 그 공포의 신발?”  “지겹지만 아무 대책이 없는 경우니 더 말하지 마!”   내 신발을 쳐다보던 친구와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지독하게 오래 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이 신발을 산 때가 대충 10년 전이었지?  그렇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얘긴데…….  그 신발을 아직도 신고 있다니 당사자인 나도 기가 막힌데  옆에서 보는 친구는 오죽했을까.       흔히 ‘랜드로바’라는 대명사로 불리는 신발을 나는 벌써 10년 가까이 신고 있다.  백화점 세일 때 산 건데 벌써 밑창만 두 번 갈았고 앞 부분이 터져서  꿰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좀 낡았을 뿐이지 별다른 흠 없이 멀쩡했으므로  새 신발을 살 수도 없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곤 ..

싸움

“본사에 가시든지 소비자 단체에 가시든지 맘대로 하세욧!”     잘 맞지 않은 옷을 바꾸러 아내와 함께 옷 산 곳에 갔더니  행사 기간에 구입한 옷이라 환불이 안 된다며  옷 가게 점원은 신경질적으로 옷을 던지며 말했다.  가끔 살다보면 누군가가 참으로 불쌍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지금의 신경질적인 저 점원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지저분한 놈을 만났는지 아니면  이빨 사이에 고춧가루가 낀 채로 지하철을 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지금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한바탕 시끄러운 싸움이 벌어지는 일만 남았다.                *          *          *   아내가 가장 자신있게 할..

망치

“그러니까 당신은 설겆이, 나는 청소를 하는 거예요.”     마치 무슨 국가간의 협상 타결에나 나올 것 같은 말투로  아내는 집안일을 강제적으로 분담시킨다.  그리고는 내 의사가 담긴 어떤 대답도 듣기 전에 무서운 속도로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해 나가기 시작했다.  방 한쪽 귀퉁이에 겨우 나만의 공간을 차지하고  최악의 조건에서 TV를 보던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청소와 설겆이라는 종목이 공평한 구분인가?  그리고 청소에 비해 설겆이가 가지는 장점은 무엇인가?  설겆이를 위해 소모되는 운동에너지와  일을 마친 뒤 찾아오는 심리적 쾌감의 절대값은 청소의 그것보다 더 클까? 등등.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설겆이란 귀찮은 일일 뿐이다.  그래서 늘 하던 전략을 이번에도 또 이용하기로 했다...

까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던 선배가무슨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무슨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는지 가만히 들어보니 ‘까치, 까치, 까치....’를연신 반복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소변기 앞을 보니조그마한 광고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XX관광호텔 나이트 클럽 웨이터 까 치입구에서 찾으시면 남녀 부킹 책임 보장’--------------------------------------  그저 건물 화장실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고 스티커였지만선배는 뭐가 그리 관심이 많은지유심히 뚫어지도록 그것을 쳐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그렇다고 해서 그 선배가 나이트 클럽을 즐겨..

맞춤법

사무실에서 동료 몇명이 맞춤법 문제를 가지고 열띤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우리말을 똑바로 사용하자는 의미에서맞춤법을 가지고 설전을 벌인다는 사실은 무척 바람직한 일일 수 있으나그것도 어느 정도 기본적인 것을 가지고 설전을 벌어야지이건 초등학생도 알만한 내용을 가지고서로 자신의 말이 맞는다고 흥분하고 있는중이었다.  분쟁의 내용은 ‘~읍니다’가 맞느냐, ‘~습니다’ 맞느냐는,한마디로 어처구니 없는 내용을 가지고치고박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듣다 못해 중간에 끼어서 ‘~습니다’가 맞는 표기라고 말해주자‘습니다’쪽의 동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읍니다’파는 말도 안되는 생트집을 잡으며끝까지 포기의 의사를 비추지 않고 있었다. 그가 주장한 생트집은 ‘습니다’가 맞는다는 정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