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변태

아하누가 2024. 6. 26. 00:25


 

 

“여보! 나 팬티하고 러닝셔츠 좀 줘!”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문득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않은 사실을 생각해 내고는
밖에 있는 아내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아내는 몹시도 귀찮다는 듯이 욕실로 손을 쑥 내밀어 속옷을 건네 주며
계속 투덜거린다.
늘 그랬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아내의 투덜거림을 애써 무시한 채
새 속옷으로 갈아 입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에 거울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랐다.
팬티는 내 것이 맞는데 런닝셔츠는 아내 것을 입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잘못 건네준 모양이다.

 


‘거참 ~ 희안하게 생겼구만…….’


 

이리봐도 저리봐도 참 우습다. 몸에 찰싹 붙는 것이 몹시도 움직임에 어색하다.
아내가 이렇게 날씬했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론 역시 제 몸에 맞아야
비로소 옷이라는 옛 말도 생각났다.
물론 옷이 날개라는 말은 당시 환경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구태여 생각하려 하진 않았다.
하지만 여자 속옷을 입고 고스톱을 치면 잘 된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갑자기 떠올라
근처에 초상집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는 했다.
내 옷으로 다시 달라고 아내에게 말하려다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그냥 이 차림으로 욕실을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나가면 재미없으니

극적인 상황 연출을 위해 해괴망측한 폼을 잡는 것이다.
맥주 광고에 나오는 ‘랄라라~’가 가장 적당한 춤이라는,
스스로 생각해도 탁월하다는 선택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일이다.
혼자서 한참을 웃다가 이제 슬슬 실행에 옮기기로 맘을 먹고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런 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해야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 * *

 

 

 

짠!
욕실 밖으로 준비된 폼을 잡으며 폴짝 뛰어 나갔더니 이게 웬일,
욕실 밖에는 친구 한 녀석이 놀러 와서 식탁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모든 예상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은 물론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할 수도 없는
묘한 상황이 만들어 졌다.

옆에 있던 아내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정신없이 웃어댄다.
갑자기 커다란 걱정이 앞섰다.
식탁에 앉아 있는 저 녀석은 누구인가?
얼마 전에 앞치마 입고 설겆이 할 때 갑자기 들어 닥친 놈 아닌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서 그 얘기를 100배로 부풀리던
바로 그놈이 아니던가?
하필이면 다른 놈도 아니고 바로 그놈이 여기 앉아 있단 말인가?

 


난 이제 영락없이 변태로 찍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행동이 이상하다고 예전부터 변태 소릴 들어왔는데
이젠 어쩔 수 없이 변태로 인정을 받아야만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생각을 하니 잠시 눈앞이 깜깜해졌으나 이내 냉정을 되찾고
일단 웃음으로 위기를 넘겼다. 친구 녀석도 웃고 말았는데

그 웃음이 영 심상치 않았다.
다만 아내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신이 나서 아까 웃던 웃음을 마저 웃고 있었다.


 

 

* * *


 

 

아내와 나 그리고 그 친구가 셋이서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보던 나의 자세가 점점 낮은 자세가 되더니

어느 덧 벽에 기대었던 등이
머리로 바뀌면서 눕다시피 한 자세가 되었다.
아내는 같이 방바닥에 눕지 못하는 상황이 불편했는지 발만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던 중 친구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아휴~ 힘들어… 나 다리 좀 펴고…….”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펴고

이리저리 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화장실에서 친구가 나오는 소리에 다시 점잖은 자세를 찾는다며
자세를 고치는 순간 거의 벌러덩 누워있던 나의 가슴을 발로 차고 말았다.
맞은 부위는 급소라 불리우는 명치에 해당하는 곳으로,

숨이 멎을듯한 고통을 동반한
아픔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충격 사이에서 헤매게 되었는데
마침 막 방으로 들어서던 친구가 그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설명하면,

화장실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에 아내가 다리를 들어 다른 쪽으로 옮긴다.
그 다리가 누워 있던 나의 명치에 닿기 0.5초전 친구가 안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나는 맞아서 사경을 헤매고 친구는 그 광경을 실감나게 목격한다.

 


바로 이렇게 된 것이다.

친구는 잠시 머쓱한 표정으로 안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이다
화장실에서 약속이 생겼는지 아니면 원래 있었던 약속이 화장실에서 생각났는지
할 일도 없을 것 같던 녀석이 갑자기 약속이 있다며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아~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변태도 모자라 이제는 집에서 맞고사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까의 그 변태사건도
세월 속으로 슬쩍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것인데…….
이 일은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계속 웃기만 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아내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다른 사람의 부인들은 남편이 어디서 망신당하는 사실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지
무척이나 신경을 쓰던데 아내는 어찌된 일인지 남보다 더 즐거워한다.
즐거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다리기까지 한다.
예전에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한복 바지끈이 풀리는 바람에 그 사람 많은데서
바지가 홀라당 내려간 일이 있었을 때도

아내는 남들보다 더 크게 웃지 않았던가?
이 사실이 다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면서 나는 무언가 또 다시
테러라는 특기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친구들 사이에 일어날 일들이 우선이다.


 

 

* * *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럴듯한 해결 방안이 생각났다.
우선 그 친구 다음으로 소문의 전달 속도가 빠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여차저차했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웃고 넘어갈 한가지 해프닝 정도로 얘기했다.
아마도 그러면 대충 웃어 넘어가는 분위기가 될 것이고
이것은 바로 친구들에게 그저 그런 일로 전달되던가 아니면
그냥 소리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게 나의 예상이었다.
얘기를 마치고 대충 반응을 보니 다행히 내 의도대로 되어가는 것 같았다.
친구도 가볍게 웃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냐며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다음 순간 내게 충격적인 소리를 남겼다.


 

“응~ 근데 어쩌냐… 그 친구 말이야. 회사 사정으로 급하게 지방 출장 갔어.
6개월 후에나 서울 온다던데…….”

“!”

 

 


이제는 완전히 망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조용히 넘어갔을 일이었을텐데. 이제는 친구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맞고 사는 변태가 되고 말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방송국 시사 프로그램 담당자로부터
출연 제의가 들어 올 지도 모른다. 대역이 필요없다고 할 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연예계로 진출할까도 그 짧은 틈에 생각했지만
그런 역 맡아서 성공했다는 스타를 아직 본 적이 없어 곧 포기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집에 가서 하면 아내는 재미있다고 또 깔깔 웃어댈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일에 속상해 하며 짜증내는 아내보다 호탕하게 웃어 넘기는 아내가
훨씬 나은 걸까?

이왕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오늘 밤은 아내 속 옷 입고 춤이라도 춰야겠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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