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르르르릉~”
굉음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모처럼 늦잠에 빠진 휴일 아침의 나를 깨웠다.
받을까 생각하다가 잠에서 깨는 것이 아까워
일단 인내력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계속 울리는 걸 보니 아내가 목욕탕에 다녀오겠다는
꿈결 속의 얘기가 현실이었나 보다.
벨은 나의 의지를 시험이라도 하듯 계속 울린다.
지난번에 24번까지 버틴 적이 있었지. 그땐 정말 사투에 가까운
인내력이 필요했었지…….
그때 일을 생각하고 벨소리의 횟수를 세면서 버티고 있으려니
어느덧 벨 소리는 20회를 넘기고 있었다.
아! 드디어 5년 만에 신기록이 작성되는 순간이다.
신기록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늘 격정적이다.
칼 루이스는 이 기분 잘 알 게다.
아무튼 어느 놈인지 모르지만 너도 참 대단한 놈이다.
“아니! 여보세요! 차를 그렇게 주차하면 어떻게 영업합니까?
차좀 빼주세요! 빨리!!!!”
겨우 수화기를 들었더니 다짜고짜 반말에 가까운 신경질적인
말투로 깡패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렇게 말하곤 끊어 버린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밤에 동네 금은방 옆에 주차를 했었다.
오늘은 휴일이라 금은방이 영업하지 않는 줄 알고 말이다.
잠이라는 것은 스포츠와 같아서 끝나기 바로 전이 가장 중요하다.
깨기 전에 마지막 남은 잠의 쾌감을 조금 더 느끼기로 하고
일단 눈을 감고 자리를 잡았다.
“때르르르릉~”
전화벨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시계를 보니 아까보다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이런……. 큰일이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TV 프로그램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배경 음악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유리창을 주전자 뚜껑으로 박박 긁는 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저 전화는 도저히 무서워서 받을 수가 없다.
저 전화를 받느니 차라리 군인들이 쓰는, 무식하게 생긴 P-77 무선통신기로
몇 대 맞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고
이 기회에 자동차를 처남에게 선물로 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벨은 계속 울린다.
이 전화를 안 받는다면 조금 전에 깬 신기록은 물론
향후 10년간 깨지기 않을 대기록이 작성될 것만 같다.
할 수 없이 목소리를 낮추며 전화를 받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까보다 더 거친 소리와 큰 소리로 욕설에 가까운 말들이 들려왔다.
황급히 자동차를 옮기겠다고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숙제 안 하고 학교 가서 숙제 검사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보다
더 겁이 나서 차를 움직이러 나가지 못할 것만 같다. 이 일을 어쩌란 말이냐?
* * *
“여보! 요 앞 금은방 앞에 있는 차 좀 빼다 줄래?”
“당신이 하지 왜요? 나 지금 와서 힘들어 죽겠어요.”
마침 목욕탕에 다녀온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내는 목욕탕에서 때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왔는지 아니면 다이어트 한다고
한증탕에서 윗몸일으키기 500번을 했는지
무척이나 힘들다는 표정으로 알아서 하라고 한다.
다시 한 번 부탁하니 아내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묻는다.
조금 비겁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에 오로지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마누라 치마 붙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다.
잠시 내 얘기를 들은 아내는 별 하찮은 일로 고민한다며
자동차 열쇠를 손에 들고 흔들흔들 장난치듯 밖으로 나갔다. 살았다.
설마 여자한테 뭐라 큰 소리야 치겠는가?
마누라를 보냈다는 사실이
금은방 주인에게는 조금 치사한 놈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 까지 생각할 상황은 아니다.
하긴 그 금은방에서 다이아반지는커녕 아기 돌반지 살 일도 없다.
잠시 후 아내는 몹시 흥분한 얼굴로 들어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차는?”
긴장한 얼굴로 물으니 아내는 아직 흥분이 채 가라 않지도 않은 얼굴로 답한다.
“보니까……. 영업에 지장은 없겠더라구요. 그래서 못 빼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뭐라 큰 소리를 치더라구요. 기가 막혀서…….”
“그래서……?”
아내는 내가 묻는 말에 잠시 웃음을 띄더니 차는 그냥 그 자리에 있지만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러더니 금방 다시 흥분한 얼굴로 금은방 주인을 흉보았다.
혹시나 자동차 바퀴에 빵꾸라도 내면 어쩌겠냐고 반문하니
아내는 그 동안 들어보지 못한 호탕한 목소리로 껄쭉하게 웃더니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안면을 바꾸고
싱크대를 모서리를 붙잡고 준비 체조라도 하는
동작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가만히 상황을 정리해 보니 주차한 금은방 옆 자리는 손님 출입에는 지장이 없지만
전시된 상품들이 안 보이게 되어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도의상
당연히 차를 빼주어야 하는 곳인데도
아내는 출입에 지장없다는 이유로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왔음이 분명했다.
자주 보는 장면이긴 하지만 가끔씩 아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선천적인 싸움 능력으로 해결하곤 했다.
참으로 옳지 못한 방법임에도 아내는 그 방법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고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생각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 때문에 만들어진 이 상황에서 구해준 아내의 은덕도 있는데
잔소리를 할 수도 없고…….
아마 금은방에서 다시 전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전화하지 않는 게
그 집 장사에 더 편안할 것이다.
* * *
“딩동! 딩동…….”
누군가가 찾아왔다.
‘누구세요?’라고 묻는 아내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불행히도, 정말로 불행히도 이런 순간에 찾아온 사람은
우유값을 받으러온 우유 배달 아주머니였다.
왜 불행하냐 하면 이번 달에 3일 동안 우유가 배달되지 않은 적이 있어서
아내는 ‘우유값 받으러 오는 날을 기다린다’는,
무시무시한 임전의 각오를 나타낸 채 D-데이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아주머니가 이 순간에 나타나다니…….
아내가 문 앞으로 나갔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상황이 종료되고 아직 덜 풀린 분풀이만 받는 일만 남았다.
업어치기나 이단옆차기만 안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우유는 끊고
주차는 좋은 곳에 해야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내는 커다란 우유병 3개를 들고 시무룩한 얼굴로 들어왔다.
이단옆차기를 하고 기세등등한 자세로 들어와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아내의 표정은 계속 시무룩했다.
어쩌된 일인지 물었더니 지난 주에 집 앞 건널목에서 교통 사고를 당해
3일간 배달을 못하다가 겨우 힘들게 다시 배달을 나왔다는
우유 배달 아주머니의 얘기였다.
우리 집 앞 길은 건널목의 신호 체계가 잘못되어 있어 몹시 위험하고
항상 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이어서
우리 아들 후연이가 뛰어 놀 때쯤의 상황을 생각하면
머리가 바짝 서는 느낌이 들곤 하는 곳이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내는 별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늘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 것 같았다.
저런 표정의 아내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내도 여자다.
남의 슬픔도 꼼꼼히 생각할 줄 아는 심성의 여자다.
역시 여자는 여자일 뿐이다.
하지만 아내는 잠시 긴 한숨을 쉬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동사무소, 구청, 시청, 지역구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 각종 사회단체 및
민원상담실……. 그리고는 특유의 기세로 큰 소리 치는데
아까의 시무룩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이번에야 말로 눈에 보이면 업어치기와 이단옆차기를 동시에 하며
곧바로 코브라 트위스트로 연결시키는 최신 기술을 펼치겠다는 자세다.
어떤 게 아내의 모습인지 알 수가 없다.
역시 여자는 단지 여자인 것인 것처럼 아내 또한 그저 아내일 뿐인가?
모든 것을 다 사람의 특성에 맞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또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부부라도 그것은 다르기 마련이니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부부일런지도 모른다.
아직도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아내를 보며
나는 1리터짜리 우유 3병을 앞에 두고 이걸 언제 다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단순한 고민만 하기로 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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