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이것 좀 열어줘요!”
잠에서 아직 30% 정도는 깨어나지 않았는데 아내는 뭐가 그리 급한지
이일 저일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아내가 열어 달라고 가져온 것은 둥그런 모양의 병으로,
꿀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꿀병이란 것은 병 뚜껑의 직경이 일반 병들에 비해 몹시 크므로
보통의 병을 열 때 주는 힘보다 훨씬 많은 힘이 필요한 데다
흘러나온 꿀의 접착력 때문에 꿀병의 뚜껑이 병에 붙어 있어서
이것을 돌려서 여는 데는 많은 힘을 필요로 했다.
더욱이 잠에서 아직 30%나 덜 깨었으니 손에 힘은 들어가지 않고
심한 수전증 환자처럼 떨리기만 했다.
초등학생 시절 아침에 잠에서 깨어서야 비로소 숙제를 하지 않은 사실이 생각나
연필을 잡고 글을 쓰려면 손이 달달달 떨려서 글을 못 쓰는 바람에
어머니가 숙제를 대신 해주신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옆에 계시던 아버지는 그걸 ‘자개바람’이라 한다시며
숙제도 도와주시지 않으면서 그 근거도 애매한 단어만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시곤 했다.
어쨌든 그런 기억이 순간적으로 오버랩되면서 수건으로 뚜껑을 감싼 채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줘봤지만
꿀물의 접착력에 붙어버린 뚜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거 도저히 열리지 않는단 말야!!!!”
경우야 다르지만 남자가 여자한테 힘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약오르기 때문에
다음에 나올 아내의 말을 애써 외면한 채 화장실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또한 남의 말을 듣기 전에 도망가는 비열한 행동은
아내와 다툴 때 내가 주로 쓰는 몇 가지 필승의 전략 중 하나이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나와보니 아내는 이미 나간 듯 눈에 보이지 않았고
아들 후연이도 세트로 없어졌다.
아마도 목욕탕에 간 것이 아니면 동네 수퍼에 무언가를 사러간 듯했다.
식탁 위에는 이미 사용한 듯한 꿀병에 뚜껑이 살짝 덮여 있다.
순간 섬뜻한 생각이 들었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열었을까?
매니큐병만한 크기라면 입에 물고 이빨로 돌려 여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꿀병의 뚜껑을 이빨로 돌려 연다는 것은
악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아내의 모습이 예전에 본 영화 ‘엘리게이터’에 나오는
흉칙한 악어의 모습으로 연상되는 한편
3차원 애니메이션을 컴퓨터로 처리한 아내와 악어의 변신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한동안 공포에 떨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아들 후연이의 이름이 갑자기 ‘후환’이란 단어로 변환되면서
문득 집안이라도 청소해야겠다는, 생존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생각이 들었다.
* * *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중
아들 녀석이 쓰던 장난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원통 모양을 한 공기주머니로 무거운 것으로 밑 부분이 만들어져 있어
오뚜기의 역할도 하는 일종의 샌드백, 아니 에어백이었다.
바람을 잔뜩 불어 넣고 주먹으로 치면 넘어졌다 스스로 일어나는 장난감이었는데
그걸 손으로 치면서 입으로는 큰 소리로 ‘뻥! 뻥!’ 하면 아들 녀석은
까르르르 웃으며 좋아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 장난감이 바람이 빠진 채 처량한 모습으로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바람을 불어 넣으려고 공기주입구를 찾아 불고 있으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풍선 불어주는 일도 한 개 불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멍해지면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곤 했었는데 무려 10배 정도의 바람이 더 들어갈 것 같은
장난감 에어백을 보니 아직 풍선 한 개 만큼의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항상 바람이 팽팽하게 들어간 상태만 보았지 직접 바람을 불어 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 동안 바람 불어 넣는 아내의 모습이
참으로 안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이걸 다 불어서 채우려면 무척이나 힘든 일일 텐데도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으니…….
그리고는 매일 저녁 아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당구만 치러 나가는,
오 헨리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한 주인공의 모습처럼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그 동안 아내의 수고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한 번도 아픈 적 없고 한 번도 아기 장난감 에어백에 바람 안 불어준다고
잔소리도 한 적이 없는 아내에게 갑자기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니 악어에서 다시 아내의 본 모습으로
컴퓨터 영상처리되듯 되돌아 오고 있었다.
아들 후연이의 이름도 인심 ‘후한’ 느낌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조기 축구 때려 치우고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힘을 길러
아기 장난감에 바람을 팽팽하게 불어주리라는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아내가 들어왔다.
시장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참? 에어백에 바람 넣어준다는 걸 깜빡 잊었구나.”
나와 에어백을 번갈아 쳐다보던 아내는 곧 베란다에서 조그만 펌프를 가져와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에어백에 바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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