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아하누가 2024. 6. 26. 00:29


 

 

“아! 이게 바로 그 책인가요?”


 

 

개인적으로는 꿈에나 그려볼 만한 나만의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책이 처음으로 나오는 날 출판사 앞까지 찾아온 일부 애독자들에게 기분낸다며
제법 비싼 책을 공짜로 펑펑 나누어 주면서도
내가 가지고 들어갈 아내의 몫인 책 한권은 꼭 잊지 않고 있었다.
제목도 <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니

글의 주인공이자 당사자인 아내로서는
두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방바닥을 치고 통곡을 하며
감동해야 할 상황이었는데도

아내는 아는척 한번 하고는 나중에 보겠다며 책을 덮는다.
기가 막힐 일이다.

 

 

가끔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아내 얘기를 하면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물론 그 안믿어주는 상황는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실을 사실대로 믿어주지 않음이 몹시도 답답했었다.
냉장고 옮겼다는 얘기도 그렇고,

감자 열개를 앉은 자리에서 먹었다는 얘기도 그렇고,
또 지하실에 강도가 들어온 것 같다며 삽을 무기삼아 들고

손전등만 켜고 내려갔다는 사실 등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자랑 같지 않은 얘기를 두어번 반복해서 박박 우겨대며
말할 수도 없었고 그저 남모를 답답함만 더해가는 중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이 얘기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만 같다.

 

 


* * *


 

 

“여보, 책 몇권 가져올 수 있어요?”

 


다음날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아내가 책이 필요하다며 현재 몇권이나 가지고 있냐는 것이었다.

 

 

“글쎄...열권 정도? 어디에 필요해서....?”

 

 

아내는 주변에서 서점가기 힘든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이 사오기로 했다며
필요한 권수를 말하는데 그 숫자는 일반인들의 숫자관념으로는 쉽게 떠오르지 않을,
가히 살인적인 숫자였다.

 

 

“한 2백권 정도 있어요?”
“......?”

 


내가 아는바로는 사무실 직원이라고 해야 10명이 채 안되고
주변의 이러저러 알게 된 사람이라고 해야 그 또한 10명이 채 안될테며
더군다나 그 사람들이 전원 합심하여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채
책을 사겠다고 나선 것도 아닐텐데 어찌하여 아내는 10권도 스무권도 아닌
2백권이나 되는 책을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어서 출판사에 전화해서

일단 100권만 사무실로 배달을 부탁했다.
그리고 평소에 침 흘리며 구경만하던 까만색 모범택시를 타고
그날은 아주 행복하게 집으로 들어갔다.


 

 

* * *


 

“그래....장사 잘 돼? 몇권이나 팔았어?”

 

 

그 다음날 저녁 놀리는듯한 말투로 묻자 아내는 보무도 당당하게 거의 다 팔았다는
얘기를 단호한 의지가 섞인 말투로 서슴없이 했다.
그리고 옆에서 내용도 모르고 징징거리는 아들 후연이를 조용히 시킨다며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았는데 받고나서 한바퀴 돌려 제 위치에 세워두는 걸보고
한두번 한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그 와중에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창숙이가 20권.... 안과장님이 8권. 오주임이 5권....”


 

아니, 서점에 가기 힘든 사람들에게 책을 대신 사다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저 명세서는 직원들에게 힘과 권력으로 강매했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내용 아닌가?
더욱이 사람마다 권수가 다른 걸 보니 일정량을 강매하는
일률적용방식을 택한 것 같지는 않았고 아마도 5권을 미니멈으로 한
기본구매의 탄력적 적용 방식의 강매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아내 회사의 직원들이 집에 놀러오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정신이나 차리려고 후연이를 던져볼까 생각했지만 실수라도 하면
어디 부러질 것 같아 애써 참고 있었다.

 

 

아내가 가져간 책중에 몇권은 표지 안쪽에 싸인을 했었다.
싸인을 하다가 웬지 나 자신도 쑥쓰러워 중간에 포기했는데
오히려 싸인한 책이 동료 직원들에게는 더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싸인이 되어 있지 않은 책은 싸인을 받아 오라며

직원들이 다시 돌려보내려기에
아내는 싸인마저 자신이 직접 해 주었다고 한다.
아내의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이 상당히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싸인을 하면 자기 싸인을 하지 왜 내 이름을 쓰노.....


 

“그래서 직원들이 그렇게 사주었군, 과장님이나 어른들은 그냥 드리지 그랬어?”


 

아내를 힐끔 쳐다봤더니 그 표정에서 나올 말이라곤 ‘돈이 어딨어요?’라는
앙칼진 목소리의 퉁명한 대사밖에는 없을 것 같아서
애써 눈길을 피하고 후연이를 잘 던져 볼 궁리만 하고 있었다.

 

 

“회사 앞에 XX은행도 갔었어요”
“그래? 거긴 왜?”
“책 선전하려고 갔지요...뭐”
“은행에서 책 장사를 하려고? 하하하”


 

하지만 아내의 말을 들으니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말끝마다 장난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 표현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므로 무언가 굉장한 경우에만 써야 한다.
아내는 책 한권을 들고 그 은행 지점장실로 찾아가 지점장과 면담을 했다고 한다.
이거 좋은 책이니 전 직원에게 선물하라는,
나름대로의 메리트를 비책으로 들고 갔었다고 한다.
물론 업무로 평소에 자주 가는 곳이라곤 하나

이 정도면 웬만한 대기업의 영업부장보다
더 수완있고 추진력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지점장에게 찾아가 그렇게 말했단 말야?”
“그렇다니까요...”

 

 

하긴, 그런 걸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고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으니
약간은 황당스러운 이 얘기를 그저 믿어주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아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근데 그 지점장님도 좀 이해가 안가더라구요”
“뭔일이 또 있었어?”

 

 

아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지점장님은 가져간 책 한권을 그냥 주는 건줄 알고 있더라구요”
“.....?”

 

 

아내는 결국 은행 지점장에게도 책값을 받았다고 한다.

 

 


* * *

 

 


정말로 남들에게 하면 믿지 못하는 얘기가 하나 있다.
아직도 아내는 그 책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그 것이다.
하기야 책을 보는 게 뭐 그리 중요하랴.
자신의 얘기를 그렇게 미화시켜주는 남편이 있고 나중에 아들이 커서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을 때 보여줄만한 책도 한권 있다는 게 행복한 것이지
굳이 자신의 얘기가 나온 글을 주절주절 읽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
아내의 생각인게다.

아직까지 아내로부터 이 부분은 어디가 잘못 되었느니
여기는 너무 과장했느니 등등의 아무런 얘기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면을 가지고 무성의라 탓하진 않는다.
사람은 그 사람답게 살 때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 처럼
아내 또한 그러는 모습이 가장 아내답다고 느껴지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런 아내가 있어서 나는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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