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여기서부터 내가 운전할께요”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시내 모 유명백화점에 가던중
주차장 입구에서 아내가 말을 건넨다.
“아니? 다 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글세, 내가 운전하면 여성전용 주차장으로 간단 말예욧!”
하긴 그렇다.
그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은 뭐가 그리 복잡한지 멀미를 참아가며
한참 동안 뱅글뱅글 돌아 내려가고도
또 이상한 기계들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곳이어서
여성전용 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과정의 불편이 한방에 해소되며
따라서 이는 화목한 쇼핑의 기본 배경이 될 뿐 아니라
아내의 심리상태를 정상적으로 다듬어
백화점 직원과의 잔인한 혈투 또한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양심이 있게 마련이라 여기까지 운전하고 온 사람은 나이고
또한 바로 앞에 주차 안내원의 모습이 보이는 곳까지 와서 운전대를 바꾸어 잡는다니
이 또한 사람의 탈을 쓰고 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 틈을 파고 들었다.
“어휴~ 쓸데없는 걱정말고 얼른 나랑 자리 바꿔요!”
아내는 내 의중을 마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고는
어느새 뒷문을 열고 나와 운전석문을 열었다.
될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뒷자리로 옮겨 아들 후연이와 놀기로 했다.
금방 주차장의 줄은 우리가 들어갈 차례가 되었고
주차를 안내하던, 아르바이트 학생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우리 차를 향해
지하 주차장으로 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아내가 갑자기 흥분했다.
“아니? 내가 남자로 보여요?”
“에이, 아줌마 조금전에 자리 바꿨으면서 왜 그래요?”
“뭐라구요?”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 이제 일은 이미 터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여성전용주차장은 차가 가득찼던 것 같았지만 그에 대한 아내의 변명과 논리는
파렴치하기 그지 없었다.
“허허~ 이 양반이? 내가 집에서부터 운전하고 오는 길이라구!”
* * *
집에서부터 운전하고 왔다?
살다살다 이렇게 비양심적으로 생트집을 잡는 사람은 처음 봤다.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다.
아내는 열쇠를 돌려 시동을 끄더니 아예 차밖으로 나가서 팔을 걷어부치고
따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봤느냐..... 나 원래 운전 잘한다....
나 새마을 금고 다니는데 한판 뜰래? 등등.
그 주차장은 입구를 향해 두줄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기 때문에
아내가 자동차로 입구를 막아버리면 뒤에서는 크락션에 고함에 난리를 치는
상황인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미리 알고 한 아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간부인 듯한 직원이 큰 소리를 치며
아르바이트 학생을 심하게 꾸짖기 시작했고 아내는 늘 그랬듯이
보무도 당당하게 차 시동을 걸더니 여성주차장으로 향한다.
뒷좌석에 있던 나는 너무도 민망해서 얌전히 있는 후연이 허벅지를 꼬집어
강제로 울리고는 울음을 달래주고 있었다.
정말 뻔뻔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만약 그 학생이 PC통신을 하는 학생이고,
그 여자의 남편이 유머란에 글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난 완전히 유머란에서 종적을 감출뻔 했었는데 말이다.
어쩌다 아내가 저렇게 되었을까.....
가만히 생각하니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예전에 몇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생각나면서부터 새삼 느끼게 되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몇가지 일들이 떠오른다.
[사례 1]
결혼전 극장안에서 초대권으로 극장에 갔더니 안내원이 아무데나 앉으라기에
빈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는 ‘람바다’라는 영화였는데 주인공들이 일은 안하고 하루종일 춤만 춰댔다.
그때 마침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가씨 두명이 우리쪽을 향해 다가왔다.
“저기요...거기 우리 자린데요?”
영화가 시작되어 모두가 조용한데 그런 소릴 들으니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니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여기가 어떻게 당신네 자리에요?”
“어? 세상에 이 아줌마 봐~ 기가 막히네.... 여기 좌석표에 우리 자리라고
표시되어 있잖아요?”
이는 누가 생각해도 싸울만한 명분이라곤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데도
아내는 그 특유의 생트집을 잡는데 그 생트집은 가히 세계챔피언 급이었다.
“좌석표에 번호 찍혀 있다고 그자리가 당신네 자리야?????”
“......?”
세상에 이런 생트집이 또 있을까?
[사례 2]
집에서 TV시청중 이곳저곳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외국 위성방송에서
축구중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열렬한 축구광인 나는 당연히 채널을 멈추었고 드라마를 보려하던 아내는
난데없는 생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 이거 얼마전에 봤잖아요!!!!”
세상에.... 어느 팀이 하는 경기인줄도 모르겠는데 날보고 그전에 봤다고 우기는 것이다.
“아니, 어떤 팀인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어이가 없는 목소리로 답하니 그래도 아내는 내가 얼마전에 이미 보았던
축구중계라며 박박 우기고 있었다.
그러던중 TV 화면에 골키퍼가 공을 놓고 뒷걸음질 치다가 앞으로 힘껏 내차는
이른바 ‘꼴킥’ 장면이 나왔다. 아내는 그틈을 놓칠세라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바로 저 장면이 저번에 있었다니까 그러네....”
축구중계를 보면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오는 저 장면을 보고 저런 생트집을 잡다니.....
하긴 그 전엔 바둑TV를 보고 있으니 지난번에도 검은 돌 하고 흰돌하고 싸웠다며
왜 본 걸 또 보냐며 자신이 보고 싶은 드라마를 틀기도 했었다.
[사례 3]
옷을 사오고....
“여보! 이거 좀 작은 것 같지 않아?”
아내가 사다준 셔츠가 조금 작은 것 같아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큰 소리로 대답한다.
“입다보면 늘어나요!”
그러려니 하며 입고 다니다 어느날은 골덴 바지를 사왔는데 이번엔 좀 컸다.
“여보! 바지가 큰데?”
그러자 아내는 늘 그렇듯이 큰 소리로 말한다.
“빨면 줄어든단 말예욧!!!”
하지만 며칠 뒤 나는 그 바지를 아내가 입고 다니는 흉칙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사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으며 또한 계속 되고 있다.
* * *
일주일 지난 일요일. 아내와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백화점 주차장 입구에서
똑같은 상황과 장면을 맞게 된다.
영화 <다이하드 2>를 보면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 아니 존 매클레인 형사가
연기가 풀풀 나오는 지하 보일러실에서 이렇게 외치는 장면이 있다.
‘아니? 어떻게 매번 크리스마스마다 똑같은 일이 생기지?’
사실 그 장면이야 영화니까 그렇게 억지를 부린거라고 쳐도
내 경우는 억지도 아니고 또한 억지부려봐도 출연료 받을 일도 없었으므로
더 황당하기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또 자리를 바꾸자고 한다.
몇번을 말해도 아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안내원도 안보이는 것 같고 또 조금이나마 편해보자는 비겁한 발상으로
결국 PC 통신에 글 쓰는 사람의 부인이라는 말만 하지 말라는,
아내 못지 않은 비열한 전제를 내걸고 자리를 바꾸었다.
주차장 입구에 다다르니 이번엔 아르바이트 학생이 아니라
늘씬하고 예쁜 안내 여직원이 주차안내를 하고 있었다. 조금 더 긴장했다.
아내는 늘씬하고 이쁜 여자를 보면 더 병적으로 흉폭해진다.
지난번 그 남학생은 비교도 안될만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내내 불안하여 이번에도 아들 후연이의 허벅지를 꼬집었지만
이 녀석도 그새 몇번 단련되었다고 울지는 않고
계속 ‘꼬꼬마, 꼬꼬마...’를 노래부르고 있다.
“2층은 만차입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세요~”
아는지 모르는지 이쁜 안내원은 다소곳하며 지성적인 목소리로 우리차를 가르키며
말했다. 하필이면 이번엔 또 만차란 말인가?
보통의 경우라면 안내원의 지시대로 아래층으로 가겠지만 내가 아는 아내는
생트집뿐만 아니라 무대뽀 (이거 일본말이랍니다.
웬만하면 쓰지 않겠습니다 - 저자 주)
정신도 탁월하여 그 정도의 지시는 듣지도 않는다.
이제 또 한바탕 시끄러워 지는 일만 남았다.
아내는 이번엔 또 무슨 생트집을 잡을까?
‘당신이 확인해 봤어???’ 이렇게 말할까? 아니면
‘그냥 여기다 차 놓고 내린다!’라고 협박할까....
앞으로 있을 반갑잖은 몇가지 경우를 예상하고 있는데
아내는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그 동안 보아오지 못했던 가장 처량한 얼굴과
불쌍한 말투로 안내직원에게 말했다.
“언니... 제가요... 운전을 못해서요...주차를 못해요.. 한번만 봐주세요! 네?”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 아내는 천재다.
아하누가
'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미늄 샷시 (0) | 2024.07.05 |
---|---|
생트집 (0) | 2024.07.02 |
주차위반 (0) | 2024.06.26 |
책 (0) | 2024.06.26 |
새마을금고 여직원 사건 (0) | 2024.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