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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게이트

아침에 화장실에 가서야 바지 앞 지퍼가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꼴로 지하철도 타고 길거리도 걸어다녔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내가 클린턴도 아니니 지퍼게이트가 난 것도 아닌데도 자꾸 민망했다. 어쩐지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건너편에 앉아 있던 어떤 이쁜 아줌마가 무척 관심있는 눈길로 나를 한참이나 쳐다본 것 같다. 응큼한 아줌마.  그런데 자세히 보니 지퍼를 안 올린게 아니라 지퍼가 망가진 것이다. 이걸 어쩐담. 화장실에 서서 낑낑거리고 어떻게든 닫아 보려 했는데 이미 망가진 지퍼는 말을 듣지 않는다. 계속 고쳐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말은 듣지 않고 화장실을 이용하러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의 그러한 행동을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고 갈 뿐이다. 다시 사무실에 내려와 아무도 없는 틈을 이..

닭대가리

대부분의 사무실 문이 그렇겠지만 내가 일하는 사무실 문도      들어올 때는 밀어야 열리고 나갈 때는 당겨야 열린다.      가끔 당길 때 민다던가 밀어야 할 때 당기는 일도 있지만      그거야 이사온 초반에나 잠시 헛갈려서 그런거지      두어달만 지나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게 된다.      더욱이 우리 사무실 문은 나갈 때 밀려고 하면 문이 부딪히는      큰 소리가 나기 때문에 금방 실수를 깨닫게 되고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도 그 큰 소리를 모두 듣게 된다.              따라서 그 사무실에서 일하는 누구도 들어오고 나갈 때      문의 열고 닫음을 실수하는 일은 없다.      다만 사무실에 찾아온 손님들이 들어오거나 나갈 때 열고 닫음을      실수해서 문이 부..

참을 수 없는 입의 간지러움

나는 농(弄)을 좋아한다. 적재 적소에 어울리는 유머는 대화의 진행을 매끄럽게 할 뿐 아니라 말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 함축적이고 인상적으로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은 물론이고 시도 때도 없이 유머 섞인 표현들을 하곤 하는데 아직까지 약간은 경직된 우리 사회는 그런 부분을 이해시키는데 약간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내가 좋아서 하는 말들인데.  * * *  얼마전부터 어느 거래처와 사업 관계가 매끄럽지 않게 돌아간다. 우리가 하는 디자인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고 책임자는 항상 입을 잔뜩 내밀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훌륭하다만 불행히도 그것은 나만의 생각인지 항상 불만이 섞인 얼굴을 하곤 한다. 그럴 때는 별 수 없다. 극약처방을 시도하는 수밖에.  "먼저 디자이너는 납품..

현장검증

예전에 어떤 대학교수가 재산상속을 이유로 아버지를 살해한 충격적이고도 패륜적인 살인 사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또 세상을 한탄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그 사건의 장소는 내가 근무하던 회사 근방이어서, 신문기사에 나온 A호프집과 B횟집은 형식상 A,B로 표기 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 ‘아마데우스’와 ‘바다횟집’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먼 곳도 아닌 주변에서 그런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자 직장에서는 단연 그 사건이 화제였고 한술 더 떠서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 사람을 본 것 같다는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무튼 내가 지내던 곳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며칠 뒤 신문 기사를 주의 깊게 읽어보던 나는 바로 그날..

아홉개의 피자 쿠폰

예전에 잘 읽던 책 중에 라는 책이 있다. 어린 시절의 베스트 셀러였으며 그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내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대에 한번 더 읽었고 30대가 되어 서점에서 부지런히 그 책을 찾아보았지만 라는 문고판이라던가 또는 어린이용으로 나와있는 책뿐이어서 구할 수가 없었다. 겨우 구한 책 한권을 읽으니 옛날 생각도 나고 약간은 유치한 듯한 절묘함에 혀를 차곤 했다. 분명 지금의 시각으로는 유치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내가 재미있다는데 누가 뭐랄까. 그저 내가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영국에는 이 책을 마치 성경책처럼 공부하며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호움즈의 이름을 따서 이라 불리우는 집단이 있다던데 거기나 가입해 볼까? 명탐정 호움즈를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그 책을 읽으면 제목중에 도..

부시와 김03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요즘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나오는 화제가 얼마전 미국에서 있었던 테러 사태에 대한 애기일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그것을 대하는 감정을 제각각이어서 수많은 감정들을 듣게 된다. 내가 하루에 만나는 사람이 기껏 많아야 다섯명 정도인데 수많은 감정을 듣게 되는 이유는 새로운 소식이 나올 때마다 순식간에 바뀌는 많은 감정의 변화 때문이다.  * * * 저녁식사를 하는데 식당에 있는 TV에서 또 그 소식이 나오자 같이 식사하던 동료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말이야 최근 며칠간 늘 있어왔던 일이라 이젠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한 동료가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했다.  "하여간 부시 저 놈도 무식해. 김03 같다니깐..." 부시가 마음에 들던 안 들던 그거야 그..

커피믹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그전에 사다둔 커피믹스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마무리 하지 않고 나온 것과 다름없이 생각하는 취향을 기자고 있다. 하지만 그 점은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 또한 대부분 비슷한 기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커피믹스는 내게 많은 갈등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이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밥을 먹고 천천히 커피믹스를 차지하기엔 많은 변수가 있으리라 판단되어 밥을 먹다 말고 얼른 커피믹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하나 남은 믹스를 재빠르게 집어 왔다. 무슨 일인지 ..

퀴즈 프로그램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즈음 텔레비전을 그나마 라는 프로그램을 제일 잘 보는 것 같고 또 그 프로그램이 제일 괜찮은 프로그램 같다. 일반인이 출연해 지식을 겨룬다는 것이 그렇고, 생방송이라는 생생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알듯모를 긴장감을 주니 그 또한 그렇다.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임성훈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진행의 3박자가 딱 맞아 떨어졌다고나 할까?   그 프로그램을 자주 보는 또 하나의 개인적인 이유는 그 시간이 그나마 집에 얌전히 잘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는 이유도 있다. 아무튼 그 방송은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즐겨보는 듯하다. 얼마전엔 자주 나가는 모임의 한 사람이 출연하는 바람에 모두들 한군데에 모여 비상대기하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찬스'를 이용하여 모르는 문제는 ..

네가 나니? 내가 너니?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컴퓨터에서 이것저것 작업을 하다 옆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들이 생각났다. 얼른 옆자리로 옮겼는데 그 컴퓨터에는 오락이 켜져 있었다. 앉아서 누군가 열어둔 오락을 했다. 한참 오락을 하다보니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아까 내가 앉았던 책상 위에 담배가 올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담배를 피우러 슬슬 내 자리로 옮겨 앉았다. 앉아 보니 아까 일하던 화면이 열려있다.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옆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가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옆자리로 옮기니 누군가 오락을 켜 두었다. 오락을 했다. 한참 오락하다 보니 담배를 피우려다 말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내 책상 위에 담배가 놓여져 있다. 자리를 옮겼더니 해야 하는 일이 화..

시계

사무실 동료 중에 노총각이 있다. 노총각 정도가 아니라 남이 보면 재혼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 정도의 총각이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 소개로 알게 되었다는 동갑내기 노처녀(그 여자도 대단한 노처녀인 셈이다)에게 연락이 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평소 그답지 않게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 상대가 맘에 안드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음은 분명했다. 관심은 없는 것 같은데 여자쪽에서 적극적인 듯한 인상을 주니 주변 사람들이 놀리는 목소리는 더욱 커진다. 전화만 한번 와도 '결혼 해야겠네' 라던가 '그냥 확 결혼해!~ 뭐 어때?' 등등 자신과 아무리 관련이 없는 남의 팔자 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곤 한다. 노총각 동료도 워낙 성격이 좋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