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지퍼게이트

아하누가 2024. 7. 8. 00:46



아침에 화장실에 가서야 바지 앞 지퍼가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꼴로 지하철도 타고 길거리도 걸어다녔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내가 클린턴도 아니니 지퍼게이트가 난 것도 아닌데도 자꾸 민망했다. 

어쩐지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건너편에 앉아 있던 

어떤 이쁜 아줌마가 무척 관심있는 눈길로 나를 한참이나 쳐다본 것 같다. 응큼한 아줌마. 

 

그런데 자세히 보니 지퍼를 안 올린게 아니라 지퍼가 망가진 것이다. 이걸 어쩐담. 

화장실에 서서 낑낑거리고 어떻게든 닫아 보려 했는데 이미 망가진 지퍼는 

말을 듣지 않는다. 계속 고쳐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말은 듣지 않고 

화장실을 이용하러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의 그러한 행동을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고 갈 뿐이다. 

다시 사무실에 내려와 아무도 없는 틈을 이용해 자리잡고 앉아 재시도를 했지만 

한번 망가진 지퍼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문득 옷핀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무실 구석구석 옷핀을 찾아보았지만 

일하는 사무실에 가정용 옷핀이 나올 리 없었다. 

대충 그거라도 있으면 일단 막아(?)두기라도 할 수 있을텐데 

사무실에서 옷핀 찾기란 낙타가 사막에서 바늘을 찾아 그 바늘구멍으로 자기 몸을 

구겨 넣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문득 눈에 뜨인 옷핀 아닌 옷핀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축구장에서 받아온 

붉은 악마의 뺏지였다. 

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지름에 붉은 악마 표시가 되어 있는 그 뺏지의 뒷면은 

내가 그리도 찾던 옷핀이 붙어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어쨌든 옷핀은 찾은 셈이다. 

얼른 그거라도 이용해보려고 의자에 앉아 벌어진 지퍼를 닫으려는데 

일반적인 옷핀하고 달리 옷핀의 크기도 작고 넓적한 뺏지의 면적 때문에 

옷핀 부분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아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혹시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신체 중요 특정 부위에 커다란 손상을 입게 된다. 

손가락을 바늘에 찔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 생긴다. 

바늘에 손가락 찔렸다고 가정파탄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 고난도의 위험한 작업을 중지하려 했는데 한편으로 생각하니 

잘하면 이번 기회에 남들 눈치 안보고 자연스럽게 확대재생산의 수술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은근히 신체 중요 특정부위를 찔리기 바랬지만 불행히도 작업은 성공리에 마쳤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무척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심리적인 안도감과 한편으로는 

평범한 옷핀으로 고정시킨 것보다 더 개성적이서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 * * 

 

점심 식사 때가 되니 동료들이 들어왔다. 

 

"하하하. 그게 뭐야? 그거 원래 거기에 다는 거야?" 

"자꾸 물어보지 마. 다 사연이 있는 거여~"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동료들은 계속 웃었다. 상황을 자세히 말할 수도 없고 

그러기도 귀찮아 저렇게 웃다 말려니 하고 아무 해명도 안하고 있었는데 

껄껄 웃던 어느 한 동료가 내게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집에 마누라가 열한명 있나봐?" 

 

이게 무슨 마누라에게 다리미로 얻어터지는 소리를 하는 건지. 

변강쇠나 카사노바가 살던 시대도 아닌데 집에 마누라 열한명 데리고 사는 놈이 있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하다 

바지 앞춤에 커다랗게 달려있는 문제의 뺏지를 다시 보았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그 뺏지에는 이런 말이 크게 적혀있었다. 

 

 

<열두번째 선수가 됩시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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