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반에서 아줌마들의 활발한 활동이 눈에 띈다.
TV속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도 그렇고, 주변만 들러보아도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집안 일도 쑥쑥 잘 해결하는 아줌마들이 많아졌다.
어쩌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원래 아줌마라는 단어 속에는 강력한 내공을 담고 있지 않은가.
아줌마 -
나는 이 단어를 예전부터 잘 알고 있다.
나이는 대략 중고생 자녀를 두었거나 혹은 그와 상응하는 나이이고
개인이나 혹은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 체면 따위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미용실에 가는 돈을 매우 아깝게 생각한다는 공통적 특징을 안고 있다.
이런 아줌마들의 특징 때문에 한때는 사회적으로
누군가를 흉보는 대상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은 적도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러한 특징들이 놀라운 생활력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하면서
아줌마들의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이제 아줌마라는 단어에서 푼수와 주책의 뉘앙스는 사라진지 오래고,
당당함과 자신감, 그리고 부지런함이 아줌마라는 단어를 대표하는 의미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 서서 부르짖지는 않았겠지만
그동안의 꾸준한 노력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 또한 아줌마다운 대단함이 아닐 수 없다.
아줌마가 느즈막한 나이에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누구나 다 같은 목소리의 감탄사를 내면서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거기에 반해 아저씨 이미지는 어떤가.
시작하는 일이 아줌마와 같은 분야라면 아줌마와 거의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주변에서 돌아오는 반응은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피할 수 없었던 아저씨만의 누명일 수도 있다.
아저씨 -
나는 이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줌마에 비하면 그 대상의 폭이 매우 넓어
갓 스무살을 넘긴 젊은이도 단지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국군아저씨로 불렸고,
담배가게 아저씨, 빵집아저씨 등 직업 때문에도 아저씨라 불려야 했으며,
이웃에 산다는 이유로 멀쩡한 직장인을 옆집 아저씨로 규정지었고
심지어 키다리 아저씨 같이 좋은 일을 하면서도
단지 신체적 특징만으로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애매한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렇듯 사회에는 다양한 아저씨들이 있지만
불행히도 사회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좋은 느낌을 주지 못하는 단어지만
전국의 아저씨들이 이러한 사실에 흥분하거나 혹은 안타깝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아저씨들은 아줌마들과 달리 자기 체질개선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가진 특징이란 것이 어떤 각도로 해석해도
좋은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들은 경제활동, 가족 부양 등 기본적 행동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행위들은 대부분
본능이나 자극 또는 충동에 의지하므로 좋은 평가가 나올 리 없다.
그러니 아저씨라는 이미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 것이다.
이렇게 상반되어지는 이미지를 잠깐 문장으로 설명해보자.
젊은 아가씨 두사람이 호젓한 공원 벤취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 아줌마가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면서 말을 건넨다.
"처녀들 뭔 얘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요? 호호호"
위 문장에 나오는 아줌마를 단지 '아저씨'로만 바꾸어 대입하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단지 한 단어만 바꿨을 뿐인데 그 뉘앙스는 마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들리게 된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 두 사람이 공원벤치에서 정답게 얘기하고 있다.
한 아저씨가 어기적거리며 다가와 말을 건넨다.
"어이 아가씨들, 오늘 한가한가 봐~"
한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던 장면이
순식간에 범죄재연드라마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다.
이건 피할 수 없었던 아저씨의 누명이 아니라 자업자득이다.
같은 아저씨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듯 나쁜 이미지를 만들어 낸 보기 흉한 행동을 가리켜 일부 아저씨들은
'일에 지친 이 땅의 가장들이 잠시 악의 없이 행한 장난끼일 뿐'이라며 둘러대곤 한다.
그러니 아저씨 소리를 듣는 것이다.
변명치고는 정말 아저씨 답게 비겁하고 졸렬한 변명이다.
그러나 -
아저씨도 아저씨 나름이다.
이 땅의 수많은 아저씨들이 모두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아저씨가 아니다.
본능에 충실하고 자극과 충동의 행동을 즐기며
격무를 핑계삼아 스트레스 해소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그런 아저씨가 아니다.
나름 문학과 예술을 즐기며, 술도 마시지 않으며,
미모 여부를 가늠하여 여자를 상대적으로 우대하거나 홀대하는 그런 아저씨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나이가 아저씨라는 호칭에 걸맞는 나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저씨로 불리는 것은 참 견디기 힘든 일이다.
적어도 내가 속해있는 집단에서
'파렴치한 아저씨', '응큼한 아저씨'라는 뉘앙스를 가진 호칭으로
불린다면 매우 억울할 것이다.
최근들어 활발해지는 아줌마들의 사회적 활동을 보면서
이와 상반된 아저씨의 한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 요즘이다.
* * *
일을 마치고 아주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는 지역은 거주자우선주차 지역인데
내가 주차해야 할 자리에 못보던 차가 주차되어 있다.
이렇게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내일 아침은 천천히 출근해도 되기에 지금 주차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아침에 주차위반 딱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주차단속을 피하기 위해
내일 아침잠을 설치며 주차를 다시 해야 하거나
또는 지금 주차단속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야 한다.
시간은 이미 새벽 1시 30분.
잠깐 갈등도 했지만 이땅의 주차질서를 바로 잡고
또 일에 지친 심신의 스트레스도 풀기 위해 주차된 차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여자 목소리가 들려 조금 당황했지만
신경질적인 말투와 목소리로 차를 옮겨달라고 소리쳤다.
잠시후 자 주인이 나타났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아가씨다.
바바리 코트 -
나는 이옷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한 때 뭔가 있어보이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자주 애용된 의상이기도 하지만
이후 여고 앞에만 출몰한다는 변태성향의 퍼포먼스 주인공 때문에
완전히 이미지를 구겨버린 의상이다.
굳이 변태성향의 이미지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미 한물 간 유행이라는 이유로
막상 입고 나가도 촌스럽게 보이는 애증의 의상이다.
그러나 주차된 차의 주인공이 입고 나타난 바라리는 그 애증의 바바라가 아니라
이름만 대면 우리나라 경제인구의 90%가 알고 있는
국내 유명 항공사의 승무원이 입는 바바리다.
바바리의 주인공은 얼핏 불빛에 비친 모습만 보아도
상당한 미모와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라는 사실도 확연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바바리 주인공의 인사에
잔뜩 화를 내려고 준비했던 멘트 대신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아유~ 안나오셔도 되는데 힘들게 나오셨어요~"
나를 힐끔 쳐다보고 아저씨임을 확인한 바바리의 여인이
자동차 문을 여는 순간 또 한번 주책없는 멘트가 터져 나왔다.
"이 전화번호로 전화하면 아가씨가 받나요? 우헤헤헤~"
바바리의 아가씨는 마치
우리에 얌전히 지내던 소가 지나가던 미친 개를 쳐다보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짓고는
아무런 대꾸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도망치듯 주차구역을 빠져나갔다.
잠시 스쳐간 얼굴은 마치 못볼 걸 봤다는 심오한 표정이었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싱겁게 웃는 자신을 발견하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는 이 땅의 가장이 격무에 지친 나머지
잠시 악의 없이 행한 장난끼 가지고 젊은 아가씨가 왜 화를 내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