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021

사무실 화분속의 난초

점심식사를 마치고 졸린 눈으로 무심코 사무실 한구석으로 눈길을 돌리니 언제부터 자리 잡고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화분 하나가 눈에 띈다. 화분에는 이미 바짝 말라있어 물이 아니라 어떠한 생명수를 갖다 부어도 절대로 살아날 것 같지 않은 난초가 심어져 있다. 그래도 난초는 난초인지라 아무리 말라 비틀어져도 지푸라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도대체 저 난초가 언제부터 저런 모양으로 변했을까. 사무실 사람들은 게으르다. 몹시 게으르다.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일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잡다한 일에 신경을 쓰면 대범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 의도적으로 무심해야 사람 대접을 받는 이상한 조직이다. 그러니 이런 악조건에 생명을 지키려는 난초가 오히려 안스러울 뿐이다.  “근데 저..

뚱뚱한 여자

점심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나른해질 무렵, 사무실의 직원 한 사람이 나른함을 깨는 말을 시작했다. 총각인 이 직원은 요즘 채팅으로 알게 된 여자가 있는데 무척 괜찮은 사람 같다며 얼굴색이 금방 홍조를 띤다. 하지만 주변에서 사람들이 관심섞인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고 답하는 동안 그 직원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급기야 풀이 죽은 목소리와 힘이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직원의 말을 빌면 아직 만난 적이 없다는 이 여자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외모가 조금 부족하다고 했다. 외모가 딸리다니? 이렇게 미묘한 대화의 주제를 두고 그냥 물러설 사무실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무리 요즘 세상이 미모가 우선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 사무실이 어떤 사무실인데 미모가..

사무실 바닥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려다 그만 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쳐다보니 어디에 재가 떨어진지도 모를 정도로 지저분하다. 슬금슬금 발로 밟고 아무 것도 모른 척 비비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무실 바닥을 보니 얼마전 일이 떠오른다. * * * 우리 사무실 바닥은 몹시 더럽다. 더럽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더럽다. 그런데도 청소를 하지 않는다. 가끔 중요한 손님이 방문할 때 요란을 떨며 물걸레질을 하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찌들어온 때가 한번에 지워지진 않는다. 그래서 대충 바닥 위에 떨어진 것만 눈에 안보이면 매우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청소를 하지 않는 이유는 위생이나 청결 정도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동료들의 청..

월드컵 개막식 입장권

이제 곧 월드컵이 시작된다. 열렬한 축구광인 내게는 둘도 없는 좋은 기회라 벌써 맘이 설레기 시작한다. 월드컵에는 개막식이 있다. 간단한 식전행사와 축구 한 경기가 고작이지만 그 상징성은 매우 크다. 월드컵 입장권을 많이 샀지만 개막전 입장권은 사지 않았다. 첫째는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였고 둘째는 굳이 가서 봐야 뭐하겠냐는 기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막일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온통 머릿속엔 개막전 관람이 가득 들어찼고 그 고민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도높게 찾아왔다.  입장권을 판매하기 시작한 지 9개월후, 그러니까 개막전의 관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지 9개월후인 지난주 토요일, 개막전 입장권을 신청했다. 이미 3등석은 매진이었고 2등석도 제일 나쁜 자리만 남아 있었다. 가격은 한 장에 30만원. 그리고 그..

논쟁 그리고.....

조용하고 평화롭던 사무실에 누군가 돌을 던졌다. 얼마전에 일어난 산불 이야기를 하던중 누군가 불쑥 이런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런데 말야. 불이 났을 때 뜨거운 물로 끄는게 더 잘 꺼질까? 아니면 차가운 물로 끄는게 더 잘 꺼질까?"  언뜻 생각하기에 전혀 비과학적이며 비상식적인 한심한 질문일 수 있는 이 주제는 먹고 사는 일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에 병적으로 집요한 집착을 보이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받아 들여져 복잡하게 얽혀지기 시작했다. 사무실 사람들은 이런 쓸데없는 일에 논쟁을 하고 자신의 억지주장을 열변하는 일을 몹시 즐거워하는 변태적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만 만나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논쟁에 참여한다. 주제는 언제나 부질없는 내용이지만 논쟁은 언제나 매우 진지하고 ..

커피 타기

커피를 무척 좋아하지만 커피 타는 일은 무척 싫어한다. 커피 타는 일이 싫은 이유는 물론 귀찮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는 다방커피, 자판기 커피 그리고 커피믹스의 세가지인데 저 세가지의 확실한 공통점은 주로 누군가 타주는 것이며, 설령 내가 타더라도 최소한의 노동력과 최소한의 상식으로 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커피가 따로 있고 설탕이 따로 있고 크림이 따로 있으면 그때부터 커피 마시는 일은 고역이 된다. 아무리 연구를 해서 잘 만들어도 내가 말한 세가지 커피 중 어느 하나와도 비슷하지 않은 묘한 맛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마실 때도 위의 세가지 커피가 아니라면 마누라가 타주는 커피, 장모님이 타주는 커피, 누나가 타주는 커피 등을 각각 따로 기억한다. 그래서 누가 타주는..

내가 대통령이면 너 문화부장관 할래?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 옆자리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지금 대통령쯤 되었으면 자네 편한 자리에 앉혀줄텐데. 미안하네...."   상황의 앞뒤 정황으로 볼 때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야 하는 분위기는 조금도 없었지만 일에 지쳤는지 아니면 자주 겪는 나의 엉뚱함에 단련이 되었는지 듣는 동료도 별로 당황하는 표정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엉뚱한 얘기가 의외로 잘 통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뭐 하고 싶어? 문화관광부 장관쯤 어때?" "그거 좋지요"  점점 더 기분이 좋아져 다른 한편에 있던 동료에게도 같은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한술 더 뜬다.  "장관이나 그런 거 말고 좀 쉬운 거 없어요? 음... 관변단체장이라던가......  왜 낙..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상식 퀴즈들이 있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어느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내용도 제법 유익하고 재미마저 있어 다른 사람에게 권해도 될만한 사이트다. 그 사이트에서는 사용자들이 서로 궁금증을 묻고 답하기도 하고 (그것이 나중에 책으로 나와 제법 많이 팔렸다.) 그 외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여러 가지 상식들이 빼곡이 쌓여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사람들도 매일 그 사이트에 간다. 사람들이 그곳에 가는 이유는 그런 풍부한 데이터 베이스 때문이 아니요 또한 지식으로의 강렬한 욕망 때문도 아니다. 단지 매일 3문제씩 나오는 퀴즈를 풀기 위해 아침이면 접속한다. 맞추는 재미도 쏠쏠하고 매일 매일 성적에 따라 지식점수가 올라가고 그것이 성적표처럼 나오니 하루하루 올라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런 일정을 ..

여자 이름, 남자 이름

약 열흘간 미국에 있다 사무실에 나오니 읽지 않은 편지가 책상 한구석에 잔뜩 쌓여있다. 한장한장 넘기다 매우 특이한 발신자 이름을 발견하고 웃음이 피식 나온다.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하거나 놀릴 생각은 없지만 매우 특이한 이름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 발신자의 이름은 '김여자'였다. 혹시나 내 말이 남을 놀리는게 되지 않는지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옆자리에서 일하던 후배사원을 불렀다.  "이봐 이 이름 정말 특이하지 않아?"  이름을 훑어본 후배는 조금전에 내가 그랬던 것과 거의 같은 웃음을 짓고는 그 또한 이름으로 남을 놀리게 되지나 않을까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반문했다.  "근데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혹시 '남자'일 수도 있겠지요?"  얼핏 맞는 말이다. 이름이 여자라고 반드시 여자..

컴맹, 넷맹 그리고 폰맹

대기업에서 일하는 친구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밥 먹고 이런 저런 얘기하다 아무래도 요즘의 화제는 모두 인터넷으로 통하는 시대니 자연스레 인터넷 얘기를 하던중 친구가 인터넷뱅킹을 개설했다고 자랑하기 시작했다. 개설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그것이 무척 신기했던 지 여기저기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화제로 삼고 있는 듯했다. 친구는 아주 신이 나서 인터넷뱅킹에 대한 얘기를 늘어 놓는다. 나는 아직 한번도 안 해봤으니 해본 친구는 신기할 수도 있겠지.  "야, 우리 사무실에 여직원이 하나 있거든. 어려. 스무너댓살 되었을꺼야. 근데 내가 인터넷 뱅킹을 개설하는 날 재미로 그 여직원에게 계좌번호 좀 불러보라고 했어. 왜긴 왜겠어. 인터넷으로 돈이 오가는 시대로 합류했으니 기분 좀 내려 그랬지. 한 2만원 송금해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