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42

배신에 관한 쓰라린 기억

1.꽤 오래 전 얘깁니다.고교야구 결승전이 한창인 동대문 운동장이었습니다.제가 열심히 응원하고 있던 모교가 엄청난 점수차로 앞서 있어우승이 거의 확정된 9회였습니다.재학생과 동문들이 슬슬 외야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우리 학교의 전통이우승하면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뛰어내려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더욱이 무려 11년 만에 있는 전국대회 우승이어서 그 기쁨은 매우 컸고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가는 듯했습니다. 결국 많은 점수차로 우승을 했고 나와 동창 한 녀석은 용감하게 외야 펜스를 넘어운동장으로 뛰어들어 갔습니다.하지만 점수차가 워낙 커서 싱거운 우승이 되었기 때문인지불행하게도 우리 둘만 빼고는 아무도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내려갈 때는 쉬워도 다시 올라오기는 어려운 곳이 바로동대문 운..

자존심에 관한 몇 가지 기억

1.친구들이 하나 둘씩 신도시 아파트로 입주할 무렵이었습니다.나이가 조금씩 먹으니이삿짐 옮긴다고 친구들을 부르던 일도 하나둘씩 줄어들어어느덧 이사한다고 친구 부르면엄청나게 욕을 얻어 먹는 때가 되고 말았습니다.물론 그렇게 욕하는 친구들이결국 이삿짐을 날라주느냐면 그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하루는 신도시 아파트에 입주하는 후배의 이사를 도우러일산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이 친구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전문 포장회사에 의뢰하지 않고각개 전투의 양상을 띤 구시대적 이사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하는 수 없이 몸으로 때워가며 겨우겨우 이삿짐을 새 집에 다 들여 놓으니일단 잡부로서의 임무는 마친 셈이었고그 다음은 당연히 중국 음식점에 인부들 먹일(?)식사를 주문하는 일만 남아 있었습니다. 으레히 그렇듯이 새로 ..

입장차이

1예전에 다니던 직장은 출판사였습니다. 단행본 팀도 있고잡지, 법전 등 다양한 부서가 있었는데 나는 소속이 잡지 팀이였습니다.따라서 명함에는 주간XX, 월간 OO 등의 타이틀이 있었고이름 앞의 직책에는 ‘기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하는 일은 기자하고는 다르지만대외적으로 여차하면 기자 역할도 해야 했으므로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하려는 어느 연말.신년 인사차 쓰일 연하장의 샘플을 구하러 을지로 근방에 갔었습니다.을지로에는 많은 연하장 제작사들이 있고따라서 많은 업체에서 단체로 주문을 하는 곳입니다.일단 샘플북을 하나 얻으려고 업소에 들어가 달라고 하니 사장인듯한 사람이위 아래를 훑어 보고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명함이나 한장 줘보라고 했습니다.명함 한장을 달라는 게 아니고 ‘줘 봐라..

쿠폰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

1전국의 어떤 사무실에서든 빠지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면자장면을 시켜먹는 일입니다.이 자장면이란 음식은 참으로 희안한 것이서 얼핏 지겨울 것 같다가도막상 딱히 먹을만한 음식이 없으면원치 않아도 저절로 시켜 먹게 되는 음식입니다.참으로 대단한 음식입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도 가끔 자장면을 시켜 먹는데 자장면을 시킬 때마다배달원이 동그란 스티커를 몇장씩 주고 갑니다.일종의 쿠폰인 그 스티커는 어느 정도 수량을 모으면서비스로 ‘탕수육’을 하나 공짜로 보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그 쿠폰을 모으겠습니까?그저 먹을 때마다 같이 따라온 스티커를식탁처럼 쓰이는 커다란 책상 밑부분에 손을 넣어대충 아무데나 붙여 버립니다.모으려고 붙이는 게 아니라 붙이는 재미에 붙입..

인내력의 화신

1어느날 사무실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앞으로 일회용 컵은 사용하지 말자구!그 대신 머그잔을 하나씩 나눠줄테니모두 각자 자신의 머그잔은 자신이 관리하도록 하는 게 어때?”  그 직원은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갑자기 동료 직원들의 머리에 큰 혼란이 왔습니다.도대체 이 공간의 정서를 몰라도 유분수지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물자절약과 환경보호라는 이유로 일화용 종이컵을 사용하지 말라니이게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료 직원들은 그 제안에 반대를 한다거나 또는다른 대안을 낼 만큼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니어서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아직 무슨 얘기인지 잘 이해가 안가겠지만 곧 알게 됩니다.  며칠 뒤 사무실 사람들의 책상마다..

어떤 불문율

1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전국의 TV를 강타하며청소년들의 가슴에 환상의 비수를 꼽던 외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이름하여 라는 프로그램으로,지금 환율이나 물가로 환산해도엄청나게 비싼 놈이 나오는 외화시리즈였습니다. 우주비행사 출신인 주인공 스티브는 우주비행 훈련중 심하게 다쳐600만불을 들여 인조인간으로 변신,사회를 위해 그 초인적인 힘을 쓴다는 얘기가 주요 내용입니다.돈을 누가 중간에 삥땅을 했는지 한쪽 눈은 마치 개눈을 박은 것 같이게슴치레했습니다. 물론 그 긴 얘기를 여기서 다할 순 없고….  그 외화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 청년과 함께 중요 인사를 구출하려고납치범들의 허술한 경비를 틈타 잠입을 시도합니다.거기서 600만불 짜리 스티브가 말합니다.     “야! 저기 능선 ..

라이터

1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라이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화장실에 담배 한개피 물고 쪼그리고 앉았다가라이터가 없었을 때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이 있는 애연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라이터는 꼭 챙겨 다닙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알다시피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이란 우스꽝스럽게도테이블 위에 담배와 라이터를각자 자기 앞에 올려 놓지 않습니까?그날도 마찬가지로 각자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는데꺼내진 라이터 모두가 좋은 라이터는 없었고 대부분 유흥업소에서 판촉물로 나누어주는일회용 라이터였습니다.흔히 있는 장면이니 그리 눈여겨 볼 만한 상황은 아니었는데갑자기 한 친구가 옆 사람 라이터에 쓰여진 광고 문구를 보고 웃었습니다.그 사람 ..

충무로 이야기

1흔히들 ‘충무로’라고 하면 영화의 거리로 알고 있지만예전에 그랬다는 얘기고,지금 충무로 거리에 직접 나서보면 영화보다는 인쇄, 출판, 디자인 분야가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오래전부터 이 곳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다 보니이제 이 충무로라는 동네의 생리를 제법 알게 되었습니다.이 동네 길을 걷다 보면 오가는 남자들이 대부분 직장인이어서 그런지길거리에서는 늘씬한 여자들이 단란주점을 비롯한각종 유흥업소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장면을 보곤 합니다.여기까지는 사무실이 밀집된 곳이라면 어디서든어렵잖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하지만 그 전단지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른 지역과 몹시 다릅니다.전단지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을 예로 들면 대충 이렇습니다. - 아니, 이거 인쇄 도대..

어떤 인질극

1평소 잘 알고 지내는 오선생이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의 일입니다.친구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급기야 기생집 또는 매미집, 또는방석집이라고 불리우는,숙박이 가능하고 고맙게도 술까지 따라주는 여자도 있는술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스무살 남짓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돈이란그 비싼 술값과 기타 용역에 대한대가를 치루기는 너무도 모자랐습니다. 모자랄 수밖에 없습니다.따라서 이미 거나하게 술자리를 벌인 일행 4명이 머리를 모아준비되어 있지 않은 술값에 대한 대안을 마련했는데,그 대안이란 어느 한 사람이 볼모로 그 술집에 남고 다른 사람들은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구해볼모로 잡혀있는 친구를 구하는 방법이었습니다.이 뛰어난 방법을 생각한 당시의 젊은이들은3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가위바위..

리메이크

1 ‘리바이벌’이란 말을 처음 듣게 된 것은어렸을 때 좋아하던 라디오의 팝송 프로그램이었습니다.좋아하던 몇 노래가 예전에 누가 부른 건데 누가 리바이벌 했다는 소리를듣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그래서 리바이벌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훗날 시간이 많이 지나서 ‘맹구’로 이름을 날린 어떤 개그맨이‘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리바이벌은 안해!’라는 말이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나오는 코미디 프로를 통해 한동안 전국을 강타한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그 프로를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열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시간이 흘러 이번엔 ‘리메이크’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단순히 반복하는 리바이벌의 차원을 넘어약간의 수정 및 변형을 가미한 것 같았습니다.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리바이벌이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