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쿠폰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

아하누가 2024. 6. 24. 00:53

1

전국의 어떤 사무실에서든 빠지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면

자장면을 시켜먹는 일입니다.
이 자장면이란 음식은 참으로 희안한 것이서 얼핏 지겨울 것 같다가도
막상 딱히 먹을만한 음식이 없으면

원치 않아도 저절로 시켜 먹게 되는 음식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음식입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도 가끔 자장면을 시켜 먹는데 자장면을 시킬 때마다
배달원이 동그란 스티커를 몇장씩 주고 갑니다.
일종의 쿠폰인 그 스티커는 어느 정도 수량을 모으면

서비스로 ‘탕수육’을 하나 공짜로 보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그 쿠폰을 모으겠습니까?
그저 먹을 때마다 같이 따라온 스티커를

식탁처럼 쓰이는 커다란 책상 밑부분에 손을 넣어
대충 아무데나 붙여 버립니다.

모으려고 붙이는 게 아니라 붙이는 재미에 붙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또 자장면을 먹게 되었는데 문득 그 스티커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는 배달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저씨 여기 좀 볼래요?
우리 이만큼 모았으니 뭐라도 하나 가져다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잔뜩 몸을 숙이고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듯 자세로

책상 안쪽을 들여다 보던 배달원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 그렇게 모으시면 안되구요. 붙이는 종이가 있는데...

어? 저기 있네요?”

 

 

배달원은 이리저리 둘러보다 자신들의 업소에서 주고간 스티커 붙이는 종이를
그 지저분한 사무실 책상의 틈에서 용케도 찾아내었습니다.
참으로 배달원의 투철한 직업의식과 뛰어난 소속감이 돋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2

식사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책상밑으로 기어들어가
아무렇게나 붙여두었던 스티커를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움직이지 않게 고정된 책상 밑에 기어 들어가 스티커를 떼어내는 과정은
너무도 힘든 일이어서 적잖은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공짜로 탕수육이 하나 생긴다면
그게 어디냐는 배부른 희망으로 열심히 떼어내고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스티커를 붙이는 종이에 부지런히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다들 행복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탕수육을 먹을 수 있는 규정상의 수량인

50개에 훨씬 못미치는 39개밖에 붙이지 못했습니다.

무척 많을거라는 건 우리들만의 상상이었고
실질적인 수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45개쯤 되면 어찌 되었든 한번 우겨볼텐데 39개 밖에 안되니

우리도 양심이 있지 어떻게 이걸로 탕수육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한사람이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하여

탕수육 100분의 78어치만 달라고 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빠른 암산 능력만 보여줬을 뿐 모두에게 시큰둥한 반응만 얻었습니다.
너무도 아쉬운 날이었습니다.

다음부터 차곡차곡 잘 모으기로 합의를 했지만

게으름과 칠칠지 못함의 일인자들인 사무실 동료들은

불과 3일이 지나지 않아 애써 모아두었던 스티커를 통째로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으로 허무한 일이었습니다.

 

 


3

자장면만 시켜먹는게 아니라 가끔씩 핏자도 시켜 먹습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핏자를 배달하면 네모난 상자 옆면에 가위로 오려서 보관하는
쿠폰이 있지 않습니까?


자장면 사건의 영향으로 핏자 상자 옆면에 있는 쿠폰을 부지런히 잘 모았습니다.
대충 손으로 찢어서 모은 것도 아니고 가위로 정성스럽게 잘라
도저히 잃어버릴 수 없는 곳에 신경써서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
그 쿠폰 10장을 모으면 핏자 한판이 서비스로 오니

그것도 꽤 괜찮은 일이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쿠폰도 하나둘씩 차곡차곡 쌓이게 되고
그 쌓여가는 쿠폰을 쳐다보며 모두들 흐뭇해 하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게으른 사람들이어서 자신이 무언가를 끝까지 모아서
그것으로 서비스를 받는 일은 처음이라며 

쿠폰 하나가 모일 때마다 매우 흥분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쿠폰 아홉장이 되는 날 생겻습니다. 

 

 

“가만있자?

 이봐, 이거 열장 언제 다 모을꺼며 또 언제 핏자 시켜먹을거지?”

 

 

 

문제는 마지막에 10장이 되는 날 혹시라도 자신이 그 자리에 없을까봐

걱정하던 한 직원의 말이 씨가 되어 커다란 혼란이 오게 되엇습니다.
하긴 그것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핏자는 주로 밤에 시켜 먹었으니
일찍 가거나 다른 일로 그 자리에 없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여 모은 쿠폰을 써먹는데 자리에 없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또한 환장할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모두 모였을 때에만 그 서비스 쿠폰을 사용하기로 했지만
비겁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한 채 쿠폰을 한장씩 나누어 가지기로 했습니다.
4명이 한장씩 나누어 가졌으니

4명이 모여야 서비스를 주문할 수 있는 쿠폰 10장이 모이게 될 것라는

아주 대단한 방법이었으며 또한 솔로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결국 네사람은 핏자 쿠폰을 한장씩 주머니에 넣었고
그동안에 보아오지 못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그날은 헤어졌습니다.

며칠 뒤 열번째 핏자를 시키게 되었고

드디어 모두의 숙원이던 쿠폰을 이용한 서비스의 혜택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봐, 김형! 쿠폰 가져왔어?”
“아니, 집에 있는데?”
“아니, 그걸 뭐하러 집에 두고 다녀? 이형은?”
“나? 그게..”

 


사건인 즉, 자신의 소지품을 잘 챙기지 못함에 정평이 나있던 사무실 동료들은
하나같이 쿠폰을 꼼꼼히 챙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에 어딘가에 잘 두었는데 못찾겠다며 고개를 가로 잦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도 지갑을 이리저리 뒤지며 분명히 넣어 두었다는 혼잣말을 하는 사람,
심지어 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옷을 빨았다며 뻔뻔한 표정으로
자수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쿠폰 가져왔냐고 처음에 묻던 사람도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말로만 큰 소리를 쳤지 분명 잃어버린 게 틀림없엇습니다.
결국 나머지 모아두었던 쿠폰도 흐지부지 없어져버려 우리 사무실에서는 아직도
핏자 쿠폰으로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4

얼마전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보았습니다.
신용카드에 사용되는 마일리지 서비스가

너무도 형편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신용카드의 마일리지 서비스는 1000만원의 실적이 있어야

 1만원의 혜택이 있으며
어떤 신용카드에서 제공하는 점심식사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시간, 장소, 음식 구분 등 무려 12가지의 제약을 받는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나 역시 신용카드를 쓰지만

제대로 된 혜택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사무실의 경우는

우리의 부주의로 서비스를 못 받은 경우였지만
신문 보도에 따르면 신용카드의 경우는 제도 자체에 무리가 있어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굳이 선진국의 쿠폰 문화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우는 너무도 조악하고
형편없는 서비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 같이 사람들이 쿠폰을 챙기지 못하는 것은 꼼꼼하지 못한 성격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모여지고 얻게 되는 혜택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신뢰만 있다면 나도 꼼꼼해 질 수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니까요.

 

 

오늘도 사무실 책상위에 돌아다니는 신용카드 청구서 구석에 적힌
마일리지 점수를 보여 씁쓸한 마음으로
쿠폰에 얽힌 기이하고도 무서운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나는 언제나 쿠폰의 혜택을 누리게 될까요.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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