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인내력의 화신

아하누가 2024. 6. 24. 00:52


1

어느날 사무실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앞으로 일회용 컵은 사용하지 말자구!

그 대신 머그잔을 하나씩 나눠줄테니
모두 각자 자신의 머그잔은 자신이 관리하도록 하는 게 어때?”

 

 

그 직원은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갑자기 동료 직원들의 머리에 큰 혼란이 왔습니다.
도대체 이 공간의 정서를 몰라도 유분수지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물자절약과 환경보호라는 이유로 일화용 종이컵을 사용하지 말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료 직원들은 그 제안에 반대를 한다거나 또는
다른 대안을 낼 만큼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니어서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아직 무슨 얘기인지 잘 이해가 안가겠지만 곧 알게 됩니다.

 

 

며칠 뒤 사무실 사람들의 책상마다 올려져 있는 머그잔에는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머그잔 하나하나의 모양이 사람이 무언가 담아서 먹는 컵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 흉칙한 모양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필기구를 담는 필통이 그 보다는 훨씬 깨끗할 정도로

머그잔은 지저분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머그잔에 커피를 마시고 조금 이따가 그 머그잔에 다시 커피를 마시고
다음날 와서 그 머그잔에 커피를 마시고.....

 

이 일을 약 한달간 반복하고 나니

동료들의 머그잔은 정말 예술 작품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해도 아직 이해가 안가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인내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내력은 매우 불행히도 쓸데없는 일에만 발휘되는 인내력이어서
아무런 실속도 없는 인내력입니다.


특히 앞서 얘기한 경우처럼 머그잔을 누가 더 안 씻고 오래 사용하는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누구보다 집요한 인내력을 발휘합니다.
특히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자신만 참으면 되는 부분의 경우에 그 인내력은
이미 인내력의 차원을 넘어

자연과 동화되기에 모자람 없이 충분하게 발휘됩니다.

 

 

결국 머그잔을 사용하자고 처음 제안한 동료는 채 한달을 못 넘기고

머그잔을 모아 옥상에 올라가 모두 깨버리면서 울분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남은 동료들은 그런 그를 보면서 인내력이 부족하다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 부족한 인내력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2

그런 인내력의 귀재들이 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임이라고 해야 별 것 아니라

사무실에서 각자의 책상에 앉아 일하던 그 자세로
돌아가면서 주제에 맞는 단어 한마디씩을 하는 게임으로
가끔씩 잘 하는 게임 아닌 게임입니다. 방식은 끝말잇기나 같습니다.

어느 날은 ‘오’자로 시작하는 3글자 단어 말하기로 게임을 했습니다.
처음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리발”

 

 

당시 사회적으로 고위층의 뇌물을 뜻하는 은어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렸기에
이 말은 상당한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다음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발탄”

 

 

유명한 코미디언들이 출연했던,

아주 오래전 고전 영화의 제목을 뜻하는 게 뻔했으므로
다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법 수준 높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나열되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그 다음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실장”
“?”
“?”

 

 

남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 거렸습니다. 이게 뭔 해괴망측한 소리입니까?
오실장이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의 직함인데
그 단어 아닌 단어를 꺼낸 사람은

나름대로 유머있게 한다고 그렇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거기서 반칙이라며 따지고 들면

얼마나 융통성 없는 놈으로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참고 하려는데 다음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박사”
“.......?”

 

 

그 뒤로 게임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오선생, 오과장, 오차장, 오부장, 오국장, 심지어 오서방까지

오씨 성 다음에 나오는 호칭 및 직함은 다 사용한 것 같았습니다.

이미 한시간이 경과한 뒤였습니다.
게임의 취지는 온데간데 없어졌고
오직 인내력의 대결만이 남은 형국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오씨성을 가진 직함으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것만 같던 순간
한사람이 말했습니다.

 

 

“오십일”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저게 분명 숫자를 말하는 것이 분명할테고 그렇다고 이 순간에 그걸 따지면
유머 감각이 없는 놈이라고 왕따 당하게 됩니다.

 


또한 게임에 임하는 인내력이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올 게 뻔했습니다.
그 집단의 사람들은 인내력이 약하다는 말은 곧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게임을 계속 진행해 나갔습니다.
오십이, 오십삼, 오십사, 오십오..... 오십구 까지 하고 나니

더 할 게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차례가 된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백일”

 

 

우리는 다시 오백이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오백으로 시작하는 숫자가 끝나면

오백이 오천으로, 오만으로, 오억으로 커져갔습니다.
그것도 할 게 없어질 것 같으면 오백이나 오천 뒤에 단위 명사를 붙여
계속 게임을 했습니다.

오백명, 오백원, 오백동, 오백호, 오백리......

 

 

참가자의 어휘력과 순발력을 겨뤄보자는 게임의 취지는 이미 없어졌고
인내력도 어느덧 한계에 다달아

정신력만이 게임을 계속 유지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게임이 시작한지 세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젠 더 이상 숫자로도 할 단어가
없어질 무렵 또 한사람이 새로은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오철민”

 

 

다들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그건 뭐냐고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말한 사람은 몹시도 당당하게

자기 친구의 이름이라고 뻔뻔하게 말했습니다.
이왕 게임의 룰은 인내력으로 승부하는 걸로 정해진 이상
거기서 더 따질 수는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룰을 안 지키는 사람이 있음에도
이 집단은 항의를 먼저하는 사람이 인내력이 약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그래서 아무도 더 이상의 항의를 못하고 계속 게임을 진행했습니다.
오성민, 오철수, 오순희, 오영자.....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 될 때까지 이름을 말하고 있었고
건물 경비원이 순찰돌 때가 되어서야 서로 모른척 하면서 게임을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더러운 게임이었습니다.

 

 


3

그런 동료직원들 사이에 요즘은 또 하나의 룰이 생겼습니다.
매일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딱히 대안이 없는 경우는
어제 먹은 집의 어제 먹은 그 메뉴로 하기로 암묵적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바로 전날 먹은 메뉴는 어느 횟집에서
두 사람은 ‘알탕’으로, 두사람은 ‘삼치구이’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5개월째 우리는 같은 메뉴를 먹습니다.
누군가 한사람이 다른 걸 먹자고 제안하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인내력이 약한 사람이 되며

그 왕따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차라리 회사를 옮기는 것보다
괴롭게 됩니다.

왕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각자 인내력에 관한한 국내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그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것이 더 싫었던 거지요.


그래서 매일매일 알탕하고 삼치구이를 먹으러 갑니다.
얼마나 알탕을 먹었는지 지금도 내 뱃속에는 수만마리의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신기한 기술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가 가는 식당엔 알탕하고 삼치구이 먹기 위해

고추냉이(일명 와사비)가 간장과 함께 나오는데

모두들 그걸 간장에 개는데는 천재적인 기술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둥글둥글 돌리는 원심력스타일과

젓가락을 한일자로 왔다갔다 움직이는 더블유(W) 스타일,
그리고 이리저리 움직여야 와사비를 간장에 푸는 지그재그 스타일 등
각각의 개성에 의해 와사비를 간장에 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내력이 가져다 준 뛰어난 기술 습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인내력이란

뜻밖의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4

예전에 문학과 외설 사이의 시비로 세인의 화제가 되었던 어느 교수가
아주 오래전에 어떤 TV 오락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잠깐의 틈에 사회자가 좋은 얘기 한마디를 부탁했더니 그 교수는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때가 있고 나쁜 때가 있고 그것은 반드시 돌고 돌게 마련이라고.
따라서 나쁜 때를 넘기는 방법은 오직 인내밖에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 장면과 그 얘기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앞서 얘기한 일들은 정말 쓸데없는 인내력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약한 인내력만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참으면 더 많은 기쁨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순간의 유혹을 못 견디고 기다리는 일들을 포기하곤 합니다.

인내력은 반드시 키워야 합니다.

인내는 반드시 어떤 선물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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