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라이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화장실에 담배 한개피 물고 쪼그리고 앉았다가
라이터가 없었을 때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이 있는 애연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라이터는 꼭 챙겨 다닙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이란 우스꽝스럽게도
테이블 위에 담배와 라이터를
각자 자기 앞에 올려 놓지 않습니까?
그날도 마찬가지로 각자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는데
꺼내진 라이터 모두가 좋은 라이터는 없었고 대부분 유흥업소에서 판촉물로 나누어주는
일회용 라이터였습니다.
흔히 있는 장면이니 그리 눈여겨 볼 만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옆 사람 라이터에 쓰여진 광고 문구를 보고 웃었습니다.
그 사람 라이터에 광고된 업소 이름은 이러했습니다.
<벌떼 과부촌>
모두들 웃으니 그 라이터의 주인공은 무안했는지
아니면 약이 올랐는지 상대방을 보고
네 것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도 평소에 유심히 본적이 없었던지
자신의 라이터를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 라이터의 광고된 업소 이름은
<럭키 단란주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밑에 작은 글씨로 <미희 200명 상시 대기, 장안의 화제!> 등등의
광고 문구가 화려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두 친구는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두 사람은 단란주점과 과부촌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 같은 말투로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업소의 사회적 공헌도와 전통적인 덕목을 강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살다보니 별 놈들을 다 봅니다.
그런 설전이 오가던 어느 순간 화살이 내게 돌아왔습니다.
“야! 네 라이터는 뭐냐?”
물론 판촉용 라이터라는 것은 이리저리 흘러
주머니에 들어오게 마련이니까
내 라이터도 어디 이상한 업소 이름이 적혀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업소의 이름이 적혀 있어도
달리 이상하게 생각할만한 근거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내 앞에 있는 라이터를 낚아채듯 휙 가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아주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게 봐? 나는 술도 안 먹잖아?”
쳐다보는 눈빛들이 하도 이상해서 얼른 라이터를 빼앗아 보니
거기에는 이런 업소의 광고가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화끈한 이발소>
가끔은 금빛나는 고급스러운 라이터도 하나쯤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2
나는 이상하게도 라이터를 잊어버리거나 라이터가 없으면 몹시 불안합니다.
그래서 라이터에 스티커를 붙여서 매직으로 이름을 써두기도 합니다.
그래야 사무실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도 주인 찾아 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던 어느날 아주 좋은 사실 한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일회용 라이터를 사려면 개당 300원 정도 하는데
대량으로 주문하면 1개당 150원 정도에 살 수 있고
또 표면에 원하는 문구도 인쇄도 해준답니다.
더욱이 그런 일을 맡아 하는 곳이 바로 옆 사무실에 이사와
주문하기도 쉬웠습니다.
그래서 당장 최소 주문 단위인 300개를 주문했습니다.
라이터에 쓰여질 광고 문구는 이렇게 정했습니다.
<김은태 전용>
남이 보면 바보짓 같았지만 나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제 책상 위나 또는 내 눈에 띄는 모든 곳에
내 라이터를 펼쳐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막상 그런 일이 생기자 주변에서 ‘치사하다’는 원성이 터져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벌인 일, 그냥 남들도 쓸 수 있게 하면 되나요?
이미 치사한 놈이 된 이상 하는 수 없이
남들이 쓰면 악착같이 못쓰게 했습니다.
쪽팔린다거나 또는 인격이라던가 하는 말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남들도 편하면 내가 굳이 힘들게 그런 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본전심리가
강해질수록 나의 엽기적인 행동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무실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무실 사람들이 내 것과 같은 라이터 300개를 주문한 것이었습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잘된 일이라 애써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문한 라이터를 힐끔 보다가 그만 실색을 했습니다.
그들이 주문한 라이터에는 이런 말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김은태만 쓰지마!>
3
친구 한 녀석은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받았다고 <ZIPPO>라고 써있는,
휘발유을 원료로 하는 라이터를 꼭 가지고 다닙니다.
2차대전때 사막전투에서 사막의 강한 모래바람에서 탱크 위에 탄 군인이
하라는 전투는 안하고
싸가지 없게 담배불을 붙였다고 유명해진 라이터입니다.
하지만 무겁고 불편합니다. 또 휘발유만 떨어지면 애물단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라이터에 불 붙이려고
휘발유를 병에 담아 옆구리에 차고 다닐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 녀석이 생각해낸 방법이
주유소에서 차 기름 넣을 때마다 내려서
자투리 한방울씩 라이터에 담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아주 알뜰하고 좋은 방법 같지만
같이 다니면서 그런 일이 생기면 아주 민망하고 추접하기 그지 없습니다.
여성 여러분, 남자들에게 라이터 선물하지 맙시다.
좋은 라이터 선물해봐야 대부분 술집에서 잃어버리고 그것이 아닌 경우는
사람을 추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라이터 선물하려면 차라리 공장에 주문해서
『사랑하는 아무개가』라고 인쇄된 일회용 라이터 300개를 선물하십시오.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 같은 모임에서 나를 잘 봐주던 여학생이 내게 좋은 라이터를
하나 선물한 적이 있었습니다.
쓰진 않고 잘 가지고 있다가 포장만 다시해서 친구 생일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립니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긴 얘기를 했지만 라이터에서 얻을 교훈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라이터는 나쁩니다.
라이터가 있는 건 대부분 담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담배는 더 나쁩니다. 여러분! 담배 피우지 맙시다!
나도 끊어야 할텐데.....
아하누가
아직도 못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