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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충무로’라고 하면 영화의 거리로 알고 있지만
예전에 그랬다는 얘기고,
지금 충무로 거리에 직접 나서보면 영화보다는 인쇄, 출판, 디자인 분야가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 곳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다 보니
이제 이 충무로라는 동네의 생리를 제법 알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 길을 걷다 보면 오가는 남자들이 대부분 직장인이어서 그런지
길거리에서는 늘씬한 여자들이 단란주점을 비롯한
각종 유흥업소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장면을 보곤 합니다.
여기까지는 사무실이 밀집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어렵잖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전단지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른 지역과 몹시 다릅니다.
전단지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을 예로 들면 대충 이렇습니다.
- 아니, 이거 인쇄 도대체 어디서 했나?
- 참내...전단지를 이렇게 디자인해서 손님이 오나?
- 여기 오타도 많군
- 음...이 사람들 돈 아끼려고 싼 데서 했구만
- 여기는 아예 삔이 나갔네?
- 비오는 날 인쇄한 모양이군. 종이가 빠다났네.
충무로에서 단란주점 하려면 홍보물도 잘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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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이 많은 곳은 어디나 그렇지만
점심식사 시간에는 식당이 손님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요즘은 누구나 핸드폰이 있기 때문에 점심 시간에도 핸드폰을 연신 받으며
업무 처리를 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장면 또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전화를 통해 오가는 대화는 몹시 다릅니다.
- 하리꼬미가 틀렸다고? 돈땡이면 맞을텐데...
- 소부판부터 구워두라 그래!
- 우선 씨엘씨로 뽑아서 시안으로 보내라구!
- 트랩정보를 열면 녹아웃 있을거야. 그거 체크했어?
- 스타일 목록이 수정되면 다른 부분도 수정되는 거 몰라?
남들이 들으면 외계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은 동네.
하지만 우리끼리는 알아듣는 말이 오가는 동네.
이곳이 바로 충무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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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 해도 충무로의 하이라이트는
속칭 인쇄 골목이라고 불리우는 인현동 일대입니다.
이곳은 각종 하청업체들이 작은 규모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한마디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곳입니다.
한번은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따라나선 친구가 이 골목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 여기서 시가전이 벌어지면 아무도 못이기겠다...”
맞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무장하여 이 인쇄 골목을 지킨다면 북한의 특수부대는 물론
미해병 네이비씰이 아니라 프랑스의 외인부대가 와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전의 지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양군이 쓰는 작전 명령을 예상한 내용입니다.
충무로 자치대의 경우 -
“자! 1소대는 세종봉투 돌아서 신광고주파와 성창지공 사이길로 들어간다. 다들 알지?
그리고 한성옵셋 앞에 2인을 매복시키고 나머지 인원은 중원소부 건너
그래픽인사이드 앞으로 집결한다.
2소대는 진성원색 쪽으로 방향을 잡아 상원도무송 앞에 매복해 있는 인원과 합류한뒤
흥부출력과 세종형압 사이길을 통해 그래픽인사이드 앞에서 1소대와 합류한다.
자! 출발!!”
미해병 네이비씰의 경우 -
지휘관 : 자! 저기...음...저 뭐라고 써있는 거야? 하여간 저 골목으로 나가면 어디가 나오나...
야! 한명 정찰하고와!
(잠시후) 지휘관 : 아니, 정찰간 놈 어디간거야?
소대장 : 지금 정찰만 17명째 보냈는데 한사람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지휘관 : 뭐? 그럼 다 포로로 잡혔단 말인가?
소대장 : 아닙니다. 연락은 계속 오는데
도저히 이곳으로 다시 오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답니다.
이곳이 충무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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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전문화된 사업이 밀집되어 유명해진 곳이 많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라스베가스나 헐리우드 그리고 실리콘밸리 등......
이런 곳들은 사업 이전에 이미 유명세를 안고 있어
사업이 성장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서울에도 유명한 곳이 많습니다.
전자상가로 유명한 용산, 쇼핑으로 유명한 동대문 일대,
중고가구가 많다는 사당동, 증권가로 알려진 여의도, 옛 모습이 담긴 안국동,
그리고 그렇고 그런 청량리 미아리 일대....
하지만 하다보니 모이게 된거지
정부 차원의 지원과 행정적인 특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빨리 우리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네가 나왔으면 합니다.
언젠가 많은 외국인들이
인쇄, 출판 관련 업무를 위해 충무로를 찾게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