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다니던 직장은 출판사였습니다. 단행본 팀도 있고
잡지, 법전 등 다양한 부서가 있었는데 나는 소속이 잡지 팀이였습니다.
따라서 명함에는 주간XX, 월간 OO 등의 타이틀이 있었고
이름 앞의 직책에는 ‘기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는 일은 기자하고는 다르지만
대외적으로 여차하면 기자 역할도 해야 했으므로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하려는 어느 연말.
신년 인사차 쓰일 연하장의 샘플을 구하러 을지로 근방에 갔었습니다.
을지로에는 많은 연하장 제작사들이 있고
따라서 많은 업체에서 단체로 주문을 하는 곳입니다.
일단 샘플북을 하나 얻으려고 업소에 들어가 달라고 하니 사장인듯한 사람이
위 아래를 훑어 보고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명함이나 한장 줘보라고 했습니다.
명함 한장을 달라는 게 아니고 ‘줘 봐라’라고 했습니다.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일단 샘플북을 얻어가야 하니 애써 참으며
명함을 주섬주섬 꺼내어 최대한 공손하게 명함을 건네 주었습니다.
사장인 듯한 사람이 명함을 보더니 아까보다 훨씬 공손해진 말투로 내게
잡지사에서 왔냐고 물었습니다.
순간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영악하게도 파악한 나는
당당하게 한술 더 떴습니다.
정기 구독자가 3만명 정도 되는데
내년 연하장을 돌리려 한다며 묻지 않은 사실도 덧붙인 것이었습니다.
3만명은 무슨 3만명입니까? 5000부 제작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말 한마디에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조금 전만해도 접수대 밖에 세워 두더니
그 얘기 하자마자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근처 다방에서 커피까지 배달시켰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멋지게 다리를 꼬고 소파에 비스듬이 걸터 앉았습니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담배도 하나 꺼내 물었습니다.
아주 거만하기 그지 없는 자세였습니다.
묻는 말에도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불과 1분 사이에 입장이 달라져도 그렇게 달라질 수 없었습니다.
그 업소 사장은 샘플북을 친절하게도 친히 전해주면서
5% 정도의 리베이트까지 약속했습니다.
떨 수 있는 온갖 오도방정을 떨면서 그 자리를 떴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장 차이 때문에 생긴 극단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평소에 무역전시관 등에서 열리는 전시회라든가 또는 근처 사무실 일대에서
대기업이 판촉 행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꼭 빠지지 않고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일명 ‘도우미’라고 불리는 홍보 전문 나레이터 모델입니다.
늘씬한 몸매에 이쁘기까지 하니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쳐다보는 것 뿐입니다.
말을 건네는 것도 무언가 물어볼 때나 한두 번 하지,
살 것도 아니면서 자꾸 물어보면 치한 취급 당합니다.
그래서 그런 여자들을 보면 나와는 사는 세상이 다른, 다른 세상 사람들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몇년전인가 회사에서 교육 비디오 제작을 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 사업의 팀장이 되어 현장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비디오에 출연할 여자 나레이터가 필요하게 되어 공개 채용하기로
모집광고를 냈습니다.
그리고 의뢰회사의 대표 자격인 나도 그 선발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하나 같이 예쁘고 잘 생긴 모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면접을 함께 하던 비디오 제작 감독은
하던 일이 워낙 그런 일이어서 그런지
나로서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 힘든 사람들에게 ‘찍’하고 반말을 던집니다.
인사만 존대말로 나누고는 바로 반말로 들어갑니다.
반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완전히 사람 무시하는 건방진 반말입니다.
예를 들면 인사를 나누고 바로 묻습니다.
‘집은 어디야? 비디오 촬영해본 적 있나?’
등등입니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 있는 내게 묻습니다.
‘김과장, 얘는 어때요?’
이런... 내가 보기엔 다들 괜찮구만 뭐가 어떠냐는 건지도 모르겠고
또 사람 면전에서 어떠냐고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주 매너없는 감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우스운 일은 그 일을 몇번 반복하다보니
그것도 생각이 달라지더라는 겁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얼마후부터는 감독하고 앉아서 면접을 볼 때
확 달라진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독이 ‘얘 어때요?’하고 물으면 처음엔 얼굴만 빨개지고
아무 말도 못했었는데
며칠 지나니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뭐 이런식입니다.
‘글쎄... 얼굴이 너무 크지 않아요?’,
‘경험이 부족한 것 같은데 잘 할 수 있겠나?’,
‘전공하곤 다른 분얀데 괜찮겠어?’ 등등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심리는 간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런 일은 또 다시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늘 하던대로 행사장에 보이는 늘씬한 모델들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3
우리나라에도 내국인들을 상대로 한 카지노가 생긴답니다.
2002년쯤 개장할 거라는데 참으로 걱정되는 일입니다.
도박 때문에 여러가지 사회적인 병폐가 자주 나타나는데 카지노까지 생기면
어쩌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반대운동을 할 수도 없고 그저 속으로만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배의 권유로
그 카지노 사업을 맡게 될 회사의 주식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그전의 생각들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오직 카지노가 잘 되야 한다는 생각만 남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입장으로 인해
그 생각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옛 성현의 말씀중에 스스로의 중심을 잡으라던가,
언제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인덕을 쌓으라는 얘기가 괜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실로 느끼게 합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도 속물 근성에서 못 벗어 나는 걸 보면
그 또한 결코 쉽잖은 일임에는 분명한가 봅니다.
언제가 되어야 처해진 입장에 상관없이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될지 걱정입니다.
어쩌면 영원히 안될 것만 같습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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