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배신에 관한 쓰라린 기억

아하누가 2024. 6. 30. 01:23



1.
꽤 오래 전 얘깁니다.
고교야구 결승전이 한창인 동대문 운동장이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응원하고 있던 모교가 엄청난 점수차로 앞서 있어
우승이 거의 확정된 9회였습니다.
재학생과 동문들이 슬슬 외야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학교의 전통이

우승하면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뛰어내려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무려 11년 만에 있는 전국대회 우승이어서 그 기쁨은 매우 컸고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가는 듯했습니다.

 

결국 많은 점수차로 우승을 했고 나와 동창 한 녀석은 용감하게 외야 펜스를 넘어
운동장으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하지만 점수차가 워낙 커서 싱거운 우승이 되었기 때문인지
불행하게도 우리 둘만 빼고는 아무도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내려갈 때는 쉬워도 다시 올라오기는 어려운 곳이 바로

동대문 운동장 펜스였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펜스 안쪽에는 같이 뛰어 내려가자던 동기들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나와 친구를 보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날 TV 중계에도 생생히 잡혔답니다.
흥분한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한다는 멘트와 함께.
1988년 봉황기 고교야구 결승전을 TV로 보신 분들은 이제 제가 누군지 알 겁니다.

 

 


2.
직장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반강제적인 사장님의 제안으로 등산을 가게 된 전 날이었습니다.
동료들이 술집에 모여서 맥주 한잔 하다가

산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내가 화제를 내일 있을 등산으로 바꾸자

저마다 내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습니다.
산을 싫어하는 것은 자신들도 어디가서 지지 않을 정도라는 둥,
용산에도 안 간다는 둥 저마다 산에 대한 싫은 추억들만 얘기하며
일방적인 사장님의 제안을 씹어대기 시작했습니다.
한 동료는 부동산에도 안 간다고 했다가 심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습니다.
신나게 퍼마신 우리 일행은 급기야 내일은 눈도장만 찍고 산에 오르지는 말고
밥 먹는 곳까지 택시타고 가자는 음흉한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등산로 입구에서 전 직원을 모아 놓고 사장님은 일장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주 내용은 불굴의 투지와 인내로 전 직원이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모두 등정에 성공하자는, 마치 독립 운동에 나가는 독립군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비장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그래도 올라가지 못 할 이유가 있느냐고 직원들에게 물었고,
그래도 못 올라가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라는,

인민재판식의 의견 통일을 하려 했습니다.

 

저는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에 뒤를 돌아다보니

저만 혼자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용감했던 어제의 용사들을 찾아보니 다들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옆사람과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손을 든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음을 확인한 사장님은 기세가 등등하여
‘자네는 지금 집에 가!’라며 내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등산이 시작되었고 어제 술자리를 같이 하던 동료들은
기가 막힌 속도로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3.
미국에 사시는 아버지께서 잠시 집에 들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가셔야 할 날짜가 되어서 공항까지 아버님을 배웅하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환전을 하시려다가 집안 책장 사이에 100달러를 두고 오셨다며
이를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 걱정하실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내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100불을 환전해서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어느날
미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책장 사이에 끼워두셨다던 100달러 얘기를 하시기에

그때서야 그 생각을 해낸 나는
마치 공돈이라도 생긴 것처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계속 말씀을 이어 가셨습니다.

 

“글쎄, 거기다 두고 온 줄 알았더니 나중에 보니 내가 가지고 왔더구나.”

 

 

그러면서 아버님은 크게 웃으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약 오르지?”

 

 

부자의 인연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심한 배신감을 느껴습니다.

 

 


4.
20대 시절에 친구들과 나이트 클럽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남자만 세 명이 갔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여자 세 명이 온 일행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좋게 표현해서 자리를 같이 한 거지
사실은 꼬셨다고 하는 것이 사실과 더욱 가깝습니다).
이게 다 자신이 웨이터에게 팁을 2만 원이나 준 덕분이라고 뻐기는 친구 목소리가
가소로웠지만 어쨌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룸에 앉아서 서로 통성명을 하는데 어쩐지 진짜 이름을 말하는 게
개운치 못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유재훈입니다’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유재훈은 그 자리에 오지 못한 선배 이름입니다.
그랬더니 눈치들을 챘는지 제 옆에 있던 김유철이란 놈 - 이 녀석은
고교야구 결승전 때 저와 같이 운동장에 뛰어 내려간 녀석입니다 - 은
‘이광효’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도 선밴데 미친개라고 불리우던 유명한 홍제동의 또라이였습니다.

김유철과 나는 둘이서 씨익 웃었고 마지막으로 김용모라는 친구가
자신을 소개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김용모라는 친구는 자신있게 자신을 소개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김은태라고 합니다. 별명은 변태지요.”

 

 

태어나서 느낀 가장 엄청난 배신감이었습니다.
그 뒤로 김용모와 나는 서로 다른 곳에서 비신사적이거나
몰염치스러운 일을 하였을 때는 서로의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얼마 안 있어 그 녀석은

지하철 여자 화장실에도 숨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온갖 방송국의 생방송 전화 코너에 열심히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전화 통화하기 더럽게 힘들더군요.
저는 지금도 지저분한 일 만나면 ‘김용모’라고 하고 다닙니다.

 

 

배신하지 맙시다.
옛날에는 마마나 호환이 무서운 병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배신이야말로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 AIDS로 숨진 사람보다

배신당한 쇼크로 숨진 사람이 더 많습니다.
또한 배신은 배신을 낳고 그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낳습니다.
우리 모두 배신 없는 밝은 사회를 만듭시다!

 

 

 

 

 

 

아하누가

 

 

 

'짧은 글 긴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물의 왕국  (0) 2024.06.30
소독차에 관한 긴 추억  (0) 2024.06.30
자존심에 관한 몇 가지 기억  (1) 2024.06.24
입장차이  (0) 2024.06.24
쿠폰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  (0) 2024.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