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등학생 시절이었습니다.
호랑이라는 동물이 우리들 사이에서 최고의 파이터로 인식되고 있던 그 때
난데없이 밀림의 왕자 레오라는 만화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오는 바람에
사자라는 동물이 뉴스타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대부분 호랑이를 용맹의 상징으로 비유하던 우리들 사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자가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무리들은 사자파와 호랑이파로 나누어졌습니다.
만날 때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상식들을 최대로 증폭하여
저마다 자신이 지지하는 동물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며칠간 그 논쟁이 반복되던 어느 하루는 옆 집 사는 중학생 형이
나름대로 절충안을 내었습니다.
그 절충안이란 초원에서 싸우면 사자가 이기고
산악 지방에서 싸우면 호랑이가 이긴다는, 그럴 듯한 이론이었습니다.
나이도 한참이나 많은 중학생 형이 그렇다는 데야 아무런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그 논쟁은 중학생 형의 말을 정답으로 삼기로 합의를 본 뒤
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2.
TV를 볼 때 나이를 떠나 재미있게 보는 프로그램이 있으니
그게 바로 동물의 왕국입니다.
나이를 먹어서 다시 보니 어린 시절의 그 논쟁은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자는 감히 호랑이한테 덩치로 보나 용맹으로 보나
한 마디로 쨉도 안 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수컷은 쌈질도 안 하고 사냥도 안 하고 긴 갈기머리만 날리며
온갖 폼만 잡는, 쓸데없는 놈이었습니다.
옛날부터 나는 호랑이파였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자가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자와 관계되는 속담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도
동물의 왕국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도 토끼를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라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자는 순발력에 비해 지구력이 약해서
죽어라 뛰어서 빠른 시간 내에 잡지 못하면 밥 굶는답니다.
게다가 이 놈들은 게을러 빠져서 배 고프기 전에는 사냥도 안 합니다.
그러니 그 속담은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보다는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는
교훈이라 해야 맞는 겁니다.
또 있습니다.
‘사자는 굶주려도 풀은 뜯어먹지 않는다’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자는 초식동물이 아니어서 풀은 못 먹는답니다.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답니다.
줘도 못 먹는답니다. 그러니 그 속담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차라리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가 더 좋은 교훈입니다.
사자는 송충이만도 못합니다.
3.
초등학교 시절 사자파를 이끌며 옆집 중학생 형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자 우위론을 주장하던 그 친구는 지금 결국 사자가 되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너 요즘 뭐하니’라고 물으면
그 친구는 항상 ‘나 사자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말을 꼭 빼놓지 않습니다.
갑자기 서울올림픽에 마스코트로 쓰였던 호랑이가 자랑스럽게 생각됩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사자는 내게 이렇게 다가와서
또 이런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통해 나는 어린 시절의 탁월한 판단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 사자가 되지 말고 호랑이가 되어야 할 겁니다.
동물의 왕국은 아주 유익한 프로그램입니다.
저질 쇼프로그램이 시청률 경쟁과 맞물려 판치는 이 세상에
가끔은 조용히 동물의 왕국에 심취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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