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소독차에 관한 긴 추억

아하누가 2024. 6. 30. 01:24


 

1.
나이 10살 무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어린 시절이 그렇듯이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바로 그 중에 하나가

어린 시절 커다란 구름을 일으키며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던,
일명 소독차라고 불리는 방역차를 미친 듯이 따라다니던 일입니다.

퀘퀘한 냄새와 함께 어우러진 분위기는

마치 심한 안개나 연막과도 같은 역할을 하여
옆에 따라오던 평소에 얄미운 놈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기에
더없이 적절한 타이밍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릴 때에는 일명 ‘아이스께끼’라고 불리는 흉칙한 놀이가 있었는데
그 놀이를 가장 완벽하게 해내던 상황도 바로 그 때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스께끼’란 놀이 아닌 놀이는 치마 입은 여학생들에게 접근한 뒤
잠시 방심하는 틈을 이용하여 빠른 손놀림으로 치마를 걷어올리고는
더 빠른 발걸음으로 도망가는 놀이를 말합니다.
그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치마를 올릴 때 ‘아이스께~~끼’라는
장난스런 억양의 목소리를 사용하여 소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중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을 때 ‘성폭력’으로 잡혀가는 것을 ‘성희롱’ 정도로
형량을 낮추겠다는 깊은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독차는 그렇게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추억으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2.
그리고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전봇대와 담벼락 사이의 작은 틈으로 공을 집어 넣는
고난도의 축구 시합을 하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독차 한 대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저걸 따라가야 될지 말아야 할지 말입니다.

중학교 1학년이라면 초등학생하고 분간이 잘 안 되니 따라다닐 만했는데
엄연히 중학교 2학년이나 된 놈이

소독차를 따라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이 축구하던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소독차에 접근하려고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뛰었습니다.
동네 어린애들하고 뛰다보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나이가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무리들 중에서는 제일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당연히 축구는 엉망이 되었지요.

난 아직도 우리나라 축구가 월드컵에서 맥을 못추는 이유를
모두 소독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독차는 어린이들의 개인 기량을 최대화할 수 있는 고난도의 골목 축구를
항상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또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구청 방역과에서 소독약을 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곳은 자동차로 방역 작업을 하지만
차가 다닐 수 없는 산동네의 골목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어깨에 기계 한 대씩 메고 돌아다닙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내가 어깨에 메던 그 기계 4대를 붙이고 차에 실으면
우리들이 어린 시절에 쫓아다니던 그 소독차가 됩니다.

 

어깨에 걸친 채 연기가 잔뜩 나가는 기계를 메고 골목길을 다니면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그 인기는

야구선수 박찬호도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이 다음에 이 녀석들이 선거권이 생기면
그 때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에 출마하자고.

하지만 지금의 내가 한 녀석도 기억 못하는 걸 보면 그들도 저를 기억 못할 겁니다.
그래서 국회의원은 포기하고

대신 국회의원들을 향해 신나게 욕지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소독약을 뿌리며 다닐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골목길에 들어설 때인데,

연막을 끄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연막을 틀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연막을 틀면서 골목길에 들어섰다가 그 길이 막다른 길일 경우
어린이들 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때 가던 길들은 자동차로도 가기 힘든 산꼭대기의 빈민가가 대부분이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느끼게 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곳에서는
또 그렇게 하루를 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4.
그리고 또 10년이 지났습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데도
오늘은 건물 주변으로 흰 연기를 잔뜩 뿜는 소독차가 지나갑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흰 연막 사이로 아스라이 피어 오릅니다.

오늘은 뛰어 나가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뭐라고 놀리든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졸졸 따라 다닐 겁니다.
넥타이를 매고 뛰어다닐 내 모습을 생각만 해도 즐겁습니다.

소독차는 아직도 내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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