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구들이 하나 둘씩 신도시 아파트로 입주할 무렵이었습니다.
나이가 조금씩 먹으니
이삿짐 옮긴다고 친구들을 부르던 일도 하나둘씩 줄어들어
어느덧 이사한다고 친구 부르면
엄청나게 욕을 얻어 먹는 때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욕하는 친구들이
결국 이삿짐을 날라주느냐면 그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하루는 신도시 아파트에 입주하는 후배의 이사를 도우러
일산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전문 포장회사에 의뢰하지 않고
각개 전투의 양상을 띤 구시대적 이사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몸으로 때워가며 겨우겨우 이삿짐을 새 집에 다 들여 놓으니
일단 잡부로서의 임무는 마친 셈이었고
그 다음은 당연히 중국 음식점에 인부들 먹일(?)
식사를 주문하는 일만 남아 있었습니다.
으레히 그렇듯이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에는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자리에
덕지덕지 스티커가 붙어 있어, 전화번호를 몰라 밥을 시킬 수 없다는
집 주인의 파렴치한 행동은 자연스레 방비할 수 있었습니다.
인부들 머릿수 만큼의 자장면과 군만두 두 개,
그리고 팔보채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마침 자리에 있던 그 후배 녀석의 형님이 내 옆에 앉게 되었는데
팔보채에 겨자 국물을 붓던 그 형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사에서 내가 이 국물을 부으려면 사람들이 말려.
나는 이걸 다 부어 버리거든. 원래 팔보채는 이 맛 아냐?”
맞습니다.
사람은 같은 취향과 사고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광분합니다.
나 역시 평소에 팔보채에 대한 맛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 형님과 나는
신나서 그 많은 겨자를 팔보채에 인정사정 없이 내리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겨자 국물의 양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 농도 또한 매우 농후하여
좋아하는 겨자 맛을 느끼기에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다는 생각이
서로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1분 전에 반갑게 확인한 서로의 취향 때문에
그에 대한 아무런 불만을 표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매워서 못 먹겠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우리 둘이는 약속이나 한 듯
이 정도가 뭐가 맵냐고 큰소리를 쳐 놓은 상태라
이제는 쳐다보기도 무서운 저 팔보채를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존심밖에 없었습니다.
둘이서는 자존심을 마지막 배수진으로 삼아
남은 팔보채를 먹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살기 위해 먹는다는 단순한 생리학적 논리를 떠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사투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남들이 보기에 자연스러운 척하려 해도
겨자는 정말 무서운 음식이었습니다.
웃는 얼굴을 지어보아도 나오는 눈물과 콧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매워서 못 먹겠다며 젓가락을 놓는다면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다 먹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알량한 자존심을 지켰다는 것과
울며 겨자 먹기라는 말이 바로 이삿집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자존심……. 그거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무 때나 발휘해서는 큰일납니다.
2.
내게는 남이 아쉬울 때까지 절대로 내 손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엄청나게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예를 들면, 빌딩에 들어설 때 회전문을 스스로 밀면
아무 의사 표시도, 노력도 없이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무척이나 얄밉게 느껴지는 심리 상태 때문에 안 들어가면 안 들어갔지
절대로 내가 남을 위해 회전문을 밀 수는 없다는 게 저의 평소 지론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없는 입구에서 마냥 기다린 일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느날 버스를 탔습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정류장은 지하철역과 함께 있어서
반드시 누군가 내리거나 또는 누군가 타는 정류장으로,
굳이 내리려는 의사표시인 벨을 누르지 않아도
차는 반드시 서게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하려고 점점 속도를 늦추고 있는데도
아무도 내릴 의사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운전수 아저씨가 앞문만 열고 뒷문을 열지 않을까 봐
차가 막 정차할 무렵 황급히 벨을 누르고 일어나 문을 향해 뛰어 가서
겨우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리면서 돌아본 내 뒤에는
자그마치 3명의 아줌마가 더 내리고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자존심……. 중요하긴 합니다만 가끔은 쓸데없는 자존심도 있습니다.
3.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놀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포커나 고스톱이 술과 함께 어울어지는 자리로,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오면
두뇌가 산만해지고 눈꺼풀이 자꾸 내려오는 증세가 나타나는데
병은 아니니까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남은 일을 마무리하다가 흐지부지 흩어지곤 합니다.
그날도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같은 방향인 친구가 있어
같이 집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녀석은 밤을 꼬박 새운 게 꽤 대견하게 느껴지는지 연신 자랑처럼
밤을 새워도 끄덕 없다는 얘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잠에는 어지간히 강하다고 평소에 생각했던지라
나름대로 나는 그보다 더 잠에 강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은 한술 더 떠서 자기가 더 잠에 강하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말싸움이 나중에는 커다란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갔습니다.
그렇게 된 발단은 그 녀석이 나와 하던 말싸움 중에 ‘잠 안 자고 버티는 능력은
나의 자존심이다’라고 말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잠을 안 자고 버티는 능력으로 대화를 하는게 아니라
서로 엄청난 자존심을 놓고 싸우게 된 것입니다.
결국 둘이는 그 시간부터 하루종일 같이 있기로 했습니다.
당구도 치고 밥도 먹고, 데이트하는 것도 아닌데 별로 반갑지 않은 녀석이랑
하루종일 같이 있으려니 그것도 쉽잖은 일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우리집으로 와서 TV가 끝날 때까지 보고 그래도 할 일이 없어
각자 편한 자세로 아무렇게나 방 한구석에 앉아 눈만 뜨고 있었습니다.
잠깐이라도 졸면 내기에 진 것이라고 상대방이 우길까 봐
1분에 한 번씩 안 자고 있다는 의사가 담긴 아무 의미 없는 말을 해야 했습니다.
대충 말하면 잠꼬대라고 우길 수도 있어서 말투 또한 가장 또박또박한 말투로
얘기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 기나긴 밤 동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또 하룻밤을 새우고 서로는 또 다른 약속이 있다면서
절대로 집에 돌아가서 퍼질러 자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변명을 각각 하고는
헤어졌습니다.
지금도 난 그 녀석을 만나는 걸 반가와 하지 않습니다.
자존심……. 중요하긴 합니다만 쓸데없는 자존심은 건강만 해칩니다.
4.
1997년 9월 28일이었습니다.
그날은 월드컵 예선에서도 아주 중요한
일본과의 경기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축구를 늘 국가적 자존심이라고 여기고 있던 내게는
커다란 의미가 담긴 경기였습니다.
저는 집안의 열화와 같은 반대를 외면한 채 일본으로 갔고
그 현장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있던 그 시각 경기장 앞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는데
정작 내가 놀란 것은 많은 인파가 아니라 과열된 분위기였습니다.
마치 붉은 옷을 입고 내리면 꼭 몰매를 맞을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릴 시간이 되자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제가 입고 있던 옷은 우리나라 대표팀과 똑같은 옷이었고
과열된 분위기 때문에
붉은 옷을 가릴 만한 무언가를 하나 덧입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같이 있던 일행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는지 차에서 내리지는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에이! 자존심이 있지!’하면서 겉옷을 벗어버리고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자존심에 대한 생각이 났습니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일이 생기면
도망갈 길 만들어 놓고 뒷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는데 그날은 평소의 나답지 않게
너무도 늠름한 자세로 붉은 유니폼만 입고 경기장에 들어섰습니다.
결과는 우리나라의 통쾌한 역전승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직도 난 그 경기를 이긴 이유가 내가 자존심 내세우고
당당하게 앞장선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존심……. 때로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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