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글을 쓰던 오랜 추억

아하누가 2024. 6. 30. 01:26


 

1.
고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친구 두 녀석이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다 선생님께 들켰습니다.
다행히 정학 같은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반성문을 매일 10장씩 제출해야 했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담배 피울 때 망을 봐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친구들의 반성문 작성을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귀찮기도 했지만 내가 잘못해서 쓰는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것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열 장씩 같은 주제로 비슷한 표현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같은 표현을 절묘하게 변형시켰습니다.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그 짓을 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반성문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에 가까운 예술이었습니다.

그 후 반성문을 쓰는 학생들은 모두 내게 검토를 받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2.
군에 입대했습니다.

무식한 몇몇 고참들은 가요책 뒷부분에서 적어 왔는지
아니면 쫄병 하나 협박해서 알아 왔는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물론 다 여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지요.
하지만 편지 한 장 달랑 보낸다고 답장이 옵니까?
가끔씩 불쌍해서 오는 답장도 있긴 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강요에 의해 할 수 없이 편지를 대신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답장이 왔더군요. 편지를 잘 써서 온 것 같진 않았고
그저 처량해 보여서 위문 편지나 보내자는 의도로 보낸 것 같았습니다.
고참 이름으로 된 답장을 또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답장이 또 왔습니다.
몇 번 편지가 오가자 부대에서 있는,

이와 비슷한 경우의 편지는 다 내가 쓰게 되었습니다.
가끔 훈련 빼주고, 보초 근무 빼주는 맛에 그 짓도 할 만 했습니다.
답장이 오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얻어 터질 만한 일은 아니어서
그것도 가끔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3.
취직이 되었습니다.

어느 출판사였는데 저는 디자인실로 취직이 되었지요.
근데 신입사원이 뭐 아는 게 있습니까?

그저 윗사람이 시키는 일 아무거나 하는 거지요.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어느 날 편집부장이 허겁지겁 ‘보도자료’라는 것을 들고
들어오더니 이러저리 둘러보고는 만만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제게 던져주며 원고지 7장 분량으로 요약해 달라고 했습니다.
신입사원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신입사원들은 의욕에 불타 있어서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내용은 주로 ‘조세법’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생전 처음 듣는 단어가 대부분 나열되어 있어 한문 읽기도 아주 어려웠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써서 부장님께 드렸습니다.

국문과 출신 부장님은 제가 쓴 원고가 맘에 들었는지
그 뒤로 1년간 원고지에 글만 써야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하곤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고,
흥미라곤 조금도 유발되지 않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글씨를 예쁘게 잘 썼기 때문이었답니다.


 

 

4.
1997년 여름 - 모 통신사 유머란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기 말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자발적인 글이었습니다.
다행히 첫 글이었던 <육군병장 김병장의 군대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봐 주어서 그 탄력을 잃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또한 관심을 주신 몇 분의 격려 메일에 어린애 마냥 신이 나서 글을 썼습니다.
글을 쓰다가 지하철 놓쳐서 택시 타고 들어간 날이 32회,
밤새 스토리 구상하다가 아침에 늦게 일어난 날이 78일,
아기 안 본다고 아내에게 폭행 당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은 날이 253일,
그리고 그에 소요된 통신비와 시간…….
이것이 PC 통신에 글 쓰며 얻은 것들입니다.

 

 

그러던 1998년 여름 -
모 출판사와 정식으로 출판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산고의 고통을 참으며 노력하다가 드디어 결실을 맺을 단계에 왔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글을 쓸 수 있는 정식 교육이라곤

초,중,고등학교 국어시간 말고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반성문과 연애 편지가 전부입니다.
그것으로 다져진 실력만으로 책을 낸다니 민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책이 어떤 모습으로 남에게 보여지고 읽혀질지 걱정만 앞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힘을 내기로 했습니다.
나는 국내 최초로 반성문으로 다져진 실력으로 책을 냄으로써
반성문을 쓰는 학생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또한 연애에 실패한 청춘 남녀들에게도 문장력은 남아 있다는 결과물을
또 하나 선물한 셈입니다.

 

 

반성문으로 다져진 실력으로 책을 낸 사람 -
살다보면 가끔씩은 사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아하누가

첫 책 <힘센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가 출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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