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표현

아하누가 2024. 6. 30. 01:27


1

어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메뉴판에 적힌 음식 이름이 너무 생소해서 옆 사람의 의견대로
여러 음식을 골고루 시켰습니다.
이것저것 골고루 시켜야 다양하게 맛을 볼 수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얼핏 이해가 가긴 했지만 곰곰히 생각하니

그 사람도 이런 곳이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테이블 가득 음식이 쌓였고

그중에 매우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빵 한조각에
맛있게 보이는 버터를 듬뿍 발랐습니다.
그리고 한 입을 용감하게 베어 먹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슬픈 일도 없었고 빵에 얽힌 쓰라린 과거도 없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버터로 알고 듬뿍 발라두었던 바로 그것이 버터가 아니라
겨자였던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눈물이 핑 돈 정도가 아니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게 되었습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생각한 것도 아닌데 눈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오래전에 재미있게 본 코미디프로를 기억해내며

이 슬픔을 웃음으로 상쇄하려 했지만
신체적 고통을 감성적 승화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입에 들어간 빵을 뱉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행여나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데 지장을 줄까봐 용감하게 삼켰습니다.
스스로 그 뛰어난 매너에 감동해서 또 눈물이 나왔습니다.
눈물을 눈물로 삼켜야 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끔찍한 기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가끔씩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할 수 없지....”

 

 


2
한 친구가 예전에 어떤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일했습니다.
연주자는 아니었고 사무적인 일을 하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를 만나러
그가 일하는 예술의전당에 갔습니다.
식사는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한다며 친구는 나와 얘기를 나누면서
직원용 식권 몇장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내려가는 길에 의자 2개를 옮겨야 한다며 하나씩 같이 들자고 제의했고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은 그 정도 일로 밥 값을 때운다니 매우 경제적인 장사라는
재빠른 환산을 하고는 의욕적으로 의자를 옮기기로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의자가 있는 곳은 예술의전당 무대 위였습니다.
무대에 올라가 의자 하나씩 들고 사무실로 옮긴 뒤

구내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가끔씩 클래식 기타 모임의 후배들을 만날 때면 늘 한가지 잘난 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희들 중에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 본 사람 있어?”

 

 


3

누나 집에 갔습니다. 초등학생 조카 녀석이 이상한 걸 가져와서 내게 물었습니다.

 

“삼촌, 이게 뭔지 알아요?”

 

가만히 보니 겨울에 입술 트지 말라고 바르는 립스틱 모양의 약이었습니다.
사람은 남이 모를줄 알고 물었을 때 그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잘난 척 하면서 뚜껑을 열고 매우 익숙한 자세를 일부러 취하며
손잡이를 빙글 돌려 앞으로 내민 뒤 입술에 쓱싹 발랐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아주 세련되고 또한 우아한 자세였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본 조카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직 멈추지 않은 웃음을 억지로 참은 뒤 내게 말했습니다.

 

“삼촌, 그거는 미술시간에 쓰는 풀이란 말이에요!!”

 

매우 황당했습니다.
무슨 풀이 그렇게 이쁜 모양으로 나오는지 그 풀을 만드는 공장에 찾아가
강력한 항의를 하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왕 입술에 바른 풀, 항의한다고 해서 잠시 당했던 망신이
아주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또한 이런 경우일수록 조금 흥분하여 다른 반박이나 또는 섣부른 변명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겐 더 우스운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 마련입니다.
이미 이런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이런 경우엔 그저 자연스러운듯 웃다가
흐지부지 잊혀지게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망한 표정을 애써 태연한 척 바꾸려는데 마침 하늘이 도우려는지
핸드폰으로 친구의 전화가 왔습니다. 꽤 오랜만에 통화하게 된 친구였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벗어나게 해준 그 친구가 너무 고마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잘 지내냐고 물었을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만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응...그저 입에 풀칠하면서 살고 있어....”

 

 

 

4

직장 다닐 때의 일입니다.
일년에 한번씩 때가 되면 건강진단을 받습니다. 몇가지 기본적인 검진을 하는데
당연히 그중에는 혈액 검사도 있어 피도 뽑아야 했습니다.
주사 맞는 것도 반갑지 않은 일인데 이건 몸 속에 피까지 뽑아가니
이 얼마나 불쾌한 일입니까?
하지만 받을 건 받아야 한다는 본전심리에 부합된 일념으로
팔을 걷어부치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내 차례가 다가 왔는데 앞에서 피를 뽑던 어느 여직원이
계속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 앉아 있길래

처음에는 피를 한 드럼통씩 뽑아 내는줄 알고 몹시 긴장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간호사가 그 여직원의 혈관을 잘못 찾아
바늘을 무려 일곱 군데나 찔렀답니다.

전문가인 간호사가 그 정도로 고생하며
피를 뽑은 걸 보니 그 여직원도 문제가 있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직원들은 그 여직원 얘기를 할 때면

꼭 이런말이 따라 붙곤 했습니다.

 


“응? 그 여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여자야....조심해!”

 

 


5

살다보면 가끔씩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절묘하다는 느낌이 드는 표현을 접하곤 합니다.
딱히 유머 감각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 그런 얘길하면 더 많은 감탄사를 연발하곤 합니다.
정말 언어라는 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커다란 혜택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그런 표현들을 찾아 하루를 보냅니다.
가끔씩 들리는 절묘한 표현은 생활의 작은 활력이 되기에도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한편의 글도 이루어지니까 상황에 걸맞는 절묘한 표현이야 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같습니다.

 

 

 

 

 

 

아하누가

이후 2008년. 영국 맨체스터에 축구보러 갔습니다.

그 유명한 맨체스터 홈구장에 입장하면서 너무 흥분된 마음에 지정된 내 자리까지 한달음에 뛰어갔습니다.

이후에 축구팀 후배들을 만나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올드트래포드>에서 뛰어본 사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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