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96

명단

문득 생각이 들어 돌아보니 이제는 꽤 오래 전 일이 되었다.         친구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모두 14명의 인원이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많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긴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니     이제야 먼 타국에 와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친구는 회사의 사장이니 직접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기엔     입장이 모호하고 친구인 내가 그 역할엔 가장 적격이어서     인원을 인솔하여 공항을 나가야 했다.     어차피 필리핀이면 가끔 가던 곳인데다 그 사실을 아는 친구도     내게 그런 부탁을 하려고 직원들 가는 곳에 한자리 끼어준 게 아닌가.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는 편이 아닌 게으른 성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아침에 후배 직원이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하더니     이내 내게 말을 건넨다.         "음악 좋아하시죠? 이거 들어보실래요?"     "뭔데?"          "코나...라는 그룹 아세요?"     "코나?"          알긴 안다.     가수 이소라가 같은 소속사 가수라는 이유로     어느 노래인지 초반부에 이소라가 노래를 불렀던 곡도 알고,     내가 좋아하는 어느 팝송과 느낌이 비슷한 노래를 불러     특별히 기억에 남는 그룹이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잘 모른다.     후배가 틀어준 노래를 들어보니 제법 상큼한 느낌을 가진 노래였다.       "제목이 뭐래?"     "이거요?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요'요"                    제목을 ..

노자를 웃긴 남자

얼마 전 TV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끈도올 김용옥 교수의 노자 강의가 있다.매주 금요일 밤에 했는데 시간이 적당해서 잘 보던 TV프로그램이었다.         거침없는 화술은 물론 그전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동양철학을나름대로 알아듣기 쉽게 강의한다는데 흥미가 있었고그런대로 강의도 들을만 했다.모처럼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시지 한 장만 달랑 남기고 도올은강의를 무작정 끝내버렸다.방송이라는 사정도 있고 개인의 사정도 있으니메시지에 적힌 내용말고도 속으로야 뭔 사정인들 있었을 테지.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일은 마치 새까만 옛 일처럼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          *      ..

두 시간의 여행

우리나라 여성 듀엣 가수에 대해 요즘 생각이 많다.     워낙 먹고사는 일 하고 관련 없는 일에 신경을 유독 쓰는 성격이어서,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라는 특이한 소재가     정작 나 자신에게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남들이 별로 가지지 않은 부분에 관심이 많다.     범상치 않은 주제에 관심이 많다면 사람도 비범한 사람이 되어야     당연하겠지만 불행하게도 나 자신은 너무도 평범한 사람에 머물고 있어     얼핏 비범한 척 하는 자신이 가끔 불쌍하게 생각 들기도 하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 여성듀엣 가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우선 '듀엣의 대가' 은방울 자매로부터 이어져 온 '시스터스' 스타일과    ..

어느 커피숍의 창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을까.         바쁠 것도 없이 지내던 어느 여름이었는데 비가 많이 내렸다.     많이 내린 정도가 아니라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퍼부었다.     군대에 있을 때는 그런 비를 보며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커피숍의 창가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쳐다보면     매우 운치 있을 것이라는 앙증맞은 상상을 했었다.              지금이라면 비로 인해 또 다른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생기니     그런 상상이야 하지 않았겠지만 군대라는 폐쇄적 사회가 가져다주는     상상의 변화로 인해 아주 철없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때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런 생각을 아무 거리낌없이 하고 있었다.    ..

염색한 아내의 머리

얼마전 일요일, 아내가 머리에 염색을 하고 왔다.     그리고 내게 어떠냐고 묻는다.       "너무 노랗지 않아요?"          글쎄. 단면적인 사회현상으로 보면 하나도 심할 것 없지만     아이가 둘 있는 엄마치곤, 그리고 아직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치곤     조금 심한 듯하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머리 색깔이 조금 노랗다고     그것이 흠이나 될까.                괜찮다고 했지만 아내는 자신이 스스로 어색하다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갈색을 조금 더 섞어서 제법 진하게 만들어 왔다.     좋겠다. 머리가 캔버스냐? 색을 넣었다 뺐다 하게.     나도 머리 숱만 많았으면 초록색도 하고 회색도 하고 초록색도 했을텐데.         하지만 아내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