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일요일, 아내가 머리에 염색을 하고 왔다.
그리고 내게 어떠냐고 묻는다.
"너무 노랗지 않아요?"
글쎄. 단면적인 사회현상으로 보면 하나도 심할 것 없지만
아이가 둘 있는 엄마치곤, 그리고 아직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치곤
조금 심한 듯하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머리 색깔이 조금 노랗다고
그것이 흠이나 될까.
괜찮다고 했지만 아내는 자신이 스스로 어색하다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갈색을 조금 더 섞어서 제법 진하게 만들어 왔다.
좋겠다. 머리가 캔버스냐? 색을 넣었다 뺐다 하게.
나도 머리 숱만 많았으면 초록색도 하고 회색도 하고 초록색도 했을텐데.
하지만 아내가 다시 수정(?)해온 머리 역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불과 2, 3년전의 시각으로 보면 무척이나 해괴망칙한 머리다.
요즘 사회가 변하다 보니 눈에 익어서 그렇지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는 불과 2, 3년의
짧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대단한 적응력이다.
하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젊은 남자가 귀 뚫고
귀걸이하고 면접시험장에 나타났다고
손가락질하는 심사관은 없을 게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자가 되면 모를까.
그렇듯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여 보수적인 기준이 상향 조정되고
있고 개성의 존중에 대한 여부가 보수적 성향을 가리는
중요한 잣대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물 흐르듯 휩쓸려 따르다보니
나 역시 개성을 존중하는 데에는 딱히 보수적이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 오전까지의 생각이다.
* * *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석을 깔고 앉아 먹는 식당이었는데
건너편에 앉은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상의는 짧아서 더 이상 내려올 수 없고 양반다리를 하고
방석에 앉아 있으려니 바지 틈은 두어뼘이나 벌어져 입고 있는
빤스가 훤히 보인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똥꼬까지 보이겠다.
그런데 그런 장면을 비단 오늘만 보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옷매무새'라는 말을 하며 그런 부분에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했는데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여자들이 팬티 정도 보여주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거래처에 갔을 때나 또는 오며가며 거리에서, 식당에서,
지하철에서, 상점에서 조금만 팔을 올려도 상의가 따라 올라가고
그러면 바지 안으로 살짝 팬티 끝이 보인다.
보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고맙게도 잘 보인다.
어느 신문에선가 보니 요즘은 아예 청바지 앞단추를 열고
팬티 앞에 붙은 브랜드를 보이는 패션이 유행이라고 하던데
그 정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어서 그런가?
그렇다고 그런 것을 보며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고, 또한 빤스 좀 보여주면서 아무에게나 섹시하게
보이려는 사람도 없을 테니 이것 참 풀기 힘든 문제다.
난 그다지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아닌데도
웬지 그런 상황은 조금 불만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보수의 강을 넘어갔나 보다.
그리고 어쩌면 기성세대의 한켠에 자리잡으려고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는 모양이다.
그게 좋은 일인지 슬픈 일인지 모르겠다만
때가 왔다는 사실은 조심스럽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지
'나는 절대로 기성세대가 아니다' 라고 외쳐봤자
스스로 추하게 할 뿐이다.
전혀 인연도 없는 한 여자의 엉덩이 쪽 빤스를 보면서
이미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하필이면 그 모티브가 된 것이 여자 팬티라니 남에게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뭐 어쩌랴. 사실인걸.
이왕 오늘부로 기성세대가 되었다고 생각이 드니
이제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살자.
싫지만 이회창이 대통령 될 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하고, 미국의 입김 때문에 내려가는 주식시장에 대해서도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자.
가슴 탱탱한 여대생이 지나가며 날 보고 아저씨라 불러도
이젠 곱게 받아들이자.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저씨가 더 멋있었던 기억을 자꾸
더듬어 보자. 분명 뭐가 있지 않을까?
아하누가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단 (0) | 2024.05.06 |
---|---|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0) | 2024.05.06 |
노자를 웃긴 남자 (0) | 2024.05.06 |
두 시간의 여행 (0) | 2024.05.06 |
어느 커피숍의 창가 (0) | 2024.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