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이 들어 돌아보니 이제는 꽤 오래 전 일이 되었다.
친구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모두 14명의 인원이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많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긴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니
이제야 먼 타국에 와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친구는 회사의 사장이니 직접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기엔
입장이 모호하고 친구인 내가 그 역할엔 가장 적격이어서
인원을 인솔하여 공항을 나가야 했다.
어차피 필리핀이면 가끔 가던 곳인데다 그 사실을 아는 친구도
내게 그런 부탁을 하려고 직원들 가는 곳에 한자리 끼어준 게 아닌가.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는 편이 아닌 게으른 성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고 입장이 입장인지라
기꺼이 13명의 인원을 인솔하고 있었다.
세관을 통과할 무렵 세관직원은 단체 여행객이냐고 묻더니
인원 명단을 모두 적어 제출하라고 한다.
세관을 통과하는 서류라면 이미 비행기 안에서 다 작성하여
제출한 것으로 아는데 또 단체 명단을 적어 내라니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행이 비로소 시작되는 공항에서의 생각이란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고픈 생각말고는 없었으므로
부지런히 14명의 이름을 적었다.
워낙 더운 곳인데다 마음이 급하고 영문으로 적어야 하니
이름 적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왜 이런 걸 적어내라는지에 대한 불만이 슬슬 커질 무렵이었다.
"저기요. 이거 내고 그냥 가시죠?"
"그게 뭔데요?"
함께 온 직원이 알 듯 모를 미소를 짓고는 뭔가 프린트된 A4 용지를
들이민다. 14명의 이름을 일일이 적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내용은 확인해 볼 겨를도 없이 그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세관 직원에게 준비된 종이를 불쑥 내민 직원은
뭔지 모를 자신감으로 의기 양양하다.
"이게 뭔가요?" <----What's this?
"이게 그거야" <----This is name list
"이게 그거라구?" <----Yes
"맞죠? 이제 가도 되요?" <----OK?
"잠깐... 이게 이름인가요?" <---Wait. I don't know what
"그게 한국말이라 그래!" <---This is Korean, OK?
"(뭔지 몰라도) 알았어! 통과" <----OK. Good Trip!
"안녕" <----I am a Boy!
* * *
"그게 뭐야?"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그가 불쑥 내민 A4 용지에 일행 이름이 적혀있는 것 같지 않았고
얼핏 보니 뭔가 한국말로 잔뜩 프린트된 것 같은 데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거요?"
직원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넌지시 대답했다.
"여행사에서 나눠진 일정표요"
"........!?"
나도 그게 뭔 짓인지 모르겠다만
여행자의 입장에선 그냥 몹시 유쾌했다.
필리핀 세관직원이 나중에 한국사람을 통해 그 명단을 번역하고
이름을 <첫째날>, <둘째날>로 기입하든
아니면 <김포공항>, <출발>로 기입하든 여행지에 도착한 설레는
여행자에게 그런 일들이야 앞으로 벌어질 여행의 기쁨을 도와줄 뿐이다.
도착해서 벌어진 웃지 않고 버틸 수 없는 그 일 때문이었는지
여행은 아주 즐겁게 지나갔고 또한 그 일은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는
두고두고 웃을 수 있는 좋은 소재를 만들어주었다.
이 또한 여행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을까?
************
축구팀 후배가 결혼한다며 결혼할 여자와 함께 사무실에 찾아왔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신혼여행지 얘기를 하다
불현듯 그 얘기가 생각났다.
그 얘기가 재미있었는지 그 예비부부는 벌써 여행을 떠날 듯한 기분에
푹 빠진 것 같았고 어딘가 가고 싶다는, 어딘가 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나 역시 덩달아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언제 어디로 떠나든 여행은 좋다. 좋고 말고.
어딘가를 떠난다는 낯선 설레임과 어딘가를 떠날 수 있다는
여유가 덩달아 따라오니 말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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