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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출판사 편집부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그 회사에서 출판하는 책들은 일반 대중 서적이 아니라 학술 관련 서적이었기 때문에 교정을 보거나 편집을 하는 데 있어서 지루함을 쉽게 느끼곤 했다. 대부분의 책 제목이 ○○론이나 ××학이어서 업무가 쉽게 따분해지기도 하고 또한 많은 한자의 잦은 등장은 업무의 집중력을 자주 떨어지게 했다. 책의 편집이 거의 끝나갈 무렵 저자의 머리말이 도착했다. 평소에 우리가 책을 읽을 때는 머리말이라는 것을 잘 읽지 않은 채 본문부터 읽어 가는데, 편집을 하다보면 저자의 마지막 원고가 바로 이 머리말이어서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의 머리말이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술 서적답게 그 머리말 또한 딱딱하고 지루한 내용이어서 그리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없었다. 다만..

화류계의 거장

아침에 사무실로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손님이 왔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그 사람이 요즘 인터넷을 알게 되어 그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주변으로부터 일명 화류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사람으로, 인터넷이나 컴퓨터하고는 거리가 몹시 멀 것만 같은 사람이었는데 인터넷의 재미에 빠져있다니 새삼 놀랄 만한 일이었다. 정말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심이 많았던지 컴퓨터를 보더니 평소에 궁금했던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한번에 쏟아 낸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문이나 질문 내용이 비교적 기초적인 것으로 보아 관심은 많고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이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무실 컴퓨터를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다니던 중 그만 컴퓨터가 다운되고 말았다...

마이더스의 손

의뢰회사의 직원이 사무실에서 함께 일을 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여직원이었다. 다만 신입사원이어서 의욕은 앞서고 업무능력은 따라주지 않아 가끔 실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로 실수하는 부분은 업무에 관련된 부분은 아니었고 또한 신입사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부분으로, 그 여직원이 만지는 기계마다 고장을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선풍기에 손을 대면 찌개 끓는 소리가 나고 컴퓨터로 일하면 여지없이 시스템이 다운되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일치점이 제법 평범하지 않아 모두들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또 그 여직원이 손댄 컴퓨터가 멈춰버리자 모두들 그 여직원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후 우리는 그를 이렇게 칭했다. "마이너스의 손" 아하누가

미들맨

의뢰 받은 일이 있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분주하던 때였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그 일에 매우 적합한 느낌이 드는 어떤 회사를 알게 되었는데 사장이 인상과 느낌이 좋다. 모든 첫인상을 정확하지도 않은 스스로의 관상학에 의지하는 성격이고 보면 그 느낌은 매우 중요했다. 외국에 본사가 있어 영어를 한국말처럼 하는 사람이었는데 말끝마다 영어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과시하는 수준 낮은 예절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았고 다만 그것이 생활화되어 말하기에 영어가 오히려 더 편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그 사람이 어떤 말인가 내게 한참을 설명하다 '미들맨'이란 단어를 썼다. 영어로 Middle Man 이라는 말인 것 같았지만 확실히 알 수가 없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차장에서 생긴 일

평소에 지하철을 타고 다니니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짐을 옮길 일이 있어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차안에 약간의 짐을 둔 채 사무실 앞 주차장에 주차하곤 사무실에 올라가 일단 급한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나서야 차에 둔 짐이 생각나서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조금 전에 주차할 때와 다른 직원이 주차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차 키는 안에 꽂아 두었으니 성큼성큼 걸어가 짐을 꺼내는데 바뀐 큰 목소리로 직원이 소리친다. "그거 아저씨 차 맞아요?" "그럼 내차 맞지. 그리고 나 아저씨 아냐" 그럼 내 차니까 짐 꺼내지 다른 사람 차인데 내가 왜 짐을 꺼내나. 한눈에 보고 차 주인을 못 알아보는 걸 보니 그 직원도 주차장 직원으로 성공하긴 틀렸다. 그러나 자칫 주차장 직원으로 성공하지 않는 것이..

민주 콜라

여동생은 표현력이 유난히 뛰어났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절묘한 표현으로 예를 들거나 또는 비교를 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늘 내게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핀잔을 주곤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요구가 전국을 뒤덮던 6월 항쟁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당시 육군 모 부대 소속 현역 군인인 나는 4박 5일간의 청원휴가를 나왔고 여동생은 명동에 있는 모 피자 체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생이었다. 여동생이 일하는 곳을 찾아간 나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와 이에 못지 않게 많은 진압 경찰, 그리고 하늘의 색깔마저 변하게 한 수많은 최루탄 가루에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군인 신분으로 느껴야만 했다. 신분증 제시와 통행 제한 등 이런저런 고생 끝에 여동생이 일하는 피자점에 도착했다. 여동생은 조금만 지나..

도시락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도시락이라는 것을 가방에 넣고 학교에 가게 되었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도시락이라는 것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고, 또한 나이가 먹어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것이기도 했다. 당시 형편으로는 보리가 잔뜩 섞인 밥에 김치 한 조각 들어 있는 것이 도시락이라는 실체의 전부였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러했기에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도시락이 있어서 하루가 뿌듯했고 즐거웠을 뿐이다. 그것이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채 말이다. 그날은 어머니가 아침부터 바쁘셔서 도시락을 가져갈 수 없었다. 칭얼거리는 나를 타이르시던 어머니는 점심 식사 시간 전에 학교에 가져다 줄테니 걱정 ..

교육 제도

벌써 10시간이 넘었다.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는 아직도 어딘지도 모를 하늘 한복판을 맴돌고 있다. 막내 동생은 좁은 비행기 좌석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잠에 푹 빠져 있다. 하긴 이 녀석이 어린 시절에는 어딘가에 등만 닿았다 싶으면 잠에 빠져들곤 해서 한때 우리가 불렀던 별명이 ‘본능아’였으니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긴 했다. 등을 힘껏 젖히고 나니 한국에 남은 마지막 남은 핏줄인 막내 동생마저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식구들이 미국에 살고 있으니 미국에 가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군대를 마치고 대학까지 졸업한 적잖은 나이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과정을 생각하니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미 가정이 있는 내 경우는 이민을 가기가 ..

피아노

조금은 오래 전 일이다. 모처럼의 일요일.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과제물을 하려고 아무 약속도 하지 않고 집에서 꾸물대고 있었다. 어차피 하기로 한 일이니 만큼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열심히 닦고 있는데 어머니가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그것이 네 칫솔이냐고 물으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를 닦다 말고 닦던 칫솔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내 칫솔이 아닐 이유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원래 이를 우악스럽고도 혈기왕성하게 닦기 때문에 다른 식구들 것보다 솔 부분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어 구분이 아주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능적인 잔머리의 대가인 나는 순수한 자신의 실수로 연못에 도끼를 빠뜨리고는 세금 한푼 내지 않고 금도끼, 은도끼를 모두 챙긴 나무꾼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아끼는 나무를 베어 버리고는 싸가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놀이

내가 지금의 우리 큰아들 후연이만 했을 때 아버지께서 아침마다 이불을 개어주셨다. 아버지가 이불을 개어주실 때마다 여동생과 함께 이불 끝 자락에 매달려 아버지가 들어올리는 이불의 각도와 만유인력의 원리를 이용하여 이불에서 굴러 떨어지는 장난을 놀이터 미끄럼틀 보다 재미있어 했다. 미끄럼틀이야 고정된 시설에서 능동적으로 시도해야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것에 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올리는 이불에 매달리는 것은 미끄럼틀이 통째로 움직이는 것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놀이동산의 '바이킹'과 흡사한 원리였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이 놀이를 개발한 나는 몹시 흥에 겨워 아침에 잠에서 깨는 일이 매우 즐겁게 느껴졌다. 같이 뒹굴던 여동생이야 용어는 몰라도 높은 곳에 올라가면 떨어진다는 만유인력의 원리 정도는 아는 나이였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