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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

어느 일요일, 아버지께서는 몸담고 계시는 어떤 모임에서 열리는 등산대회에 가신다며 나와 같이 갈 것을 제안하셨다. 많은 어르신들하고 같이 있다는 게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리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또 이 기회에 효도라도 한번 해야겠다며 순순히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최종 목적지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등산코스로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끔 오르던, 젊은 사람들에겐 산책 정도 되는 그리 높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그곳을 찾으니 그 전의 그곳보다는 한참이나 높게만 느껴질 정도로 힘들게 올라가야만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가뿐 숨을 고르며 잠시 쉬는데 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어르신들이 무언가 곤란한 일이 생긴 듯했고, 의견을 주고 받으시던 얘기중에 아버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리 아들에게 ..

버스

“후다다다닥~” 네거리 모퉁이로 도는 버스가 보이기 무섭게 아내는 이미 도루를 시작한 이종범 선수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버스를 탈 때 버스를 타려는 사람이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항상 일등으로 탄다. 아내가 버스를 일등으로 타는 목적은 당연히 앉아서 가겠다는 젊은 사람답지 않은 불건전한 의도였고, 항상 일등으로 버스를 타는 이유는 탁월한 위치 선정 능력과 불타는 투지, 그리고 압도적으로 우위를 보이는 뛰어난 몸싸움 능력이라는 3박자를 고루 갖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뛰면 나도 뛰어야만 했다. 아내는 일등으로 버스에 오르면 항상 맨 뒷자리에 큼직한 엉덩이로 두 사람 몫을 차지하고 있다가 뒤늦게 내가 타면 자리를 만들어 줬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뒷좌석 두 자리 정도를 차지하고 옆으로 길게 ..

변명

“이럴 때는 이렇게 변명하면 괜찮지 않겠어요?” 아내는 모든 일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항상 그것에 대한 그럴 듯한 변명 몇 가지를 미리 준비해 놓고 이를 연습하곤 했다. 아내와 같이 차를 타고 약간 먼 곳에 있는 창고형 마트에서 이것저것 생활용품을 사고 오는 길이었는데 안전띠를 매는 것을 몹시도 귀찮게 여기는 아내가 불쑥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뭐라 할 건데 그래?” “임신했다고 하면 간단하지 않겠어요? 설마 임산부한테 안전띠 안 매었다고 딱지 끊지는 않겠지……. 배도 이만큼 나왔으니 그럴 듯 하지 않아요?” 언뜻 황당무계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론 그 많고 많은 변명 중에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아내의 상황 대처 능력이 감동적인 것을..

천재 교육

“후연이가 아무래도 천재 같아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한 마디를 던진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아무래도 아들 녀석에게 천재성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 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아내는 무언가 보여주겠다며 서둘러 아기 장난감이 잔뜩 어지렵혀져 있는 방으로 갔다. “당근 집어 봐라아~ 당근 ~”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 녀석은 어지럽게 널브러진 그림 카드 중에서 정확하게 당근을 집어왔다. 제법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제 돌 지난 지 4개월 정도 되었으니 생후 16개월밖에 안 된, 말도 할 줄 모르는 갓난 아기가 말귀를 알아 듣고 있으니 꽤 대단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내는 뭔가 엄청난 것이라도 발견한 듯이 유난히 호들갑을 떨면..

아내의 메모

----------------------------------------- 김XX 두 공기 (A+) OO아빠 한 공기도 다 못 먹었음 유XX 한 가지 반찬만 먹음 정OO 술만 좋아함 ----------------------------------------- 아내는 언제부터 그 원리를 알았는지 엄청난 메모광이다. 머리가 나쁘면 메모라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신념인지 아내는 다음 날 아침에 가지고 가야 할 물건들이나 아기 병원 가는 일정은 물론, 세탁소에 맡긴 옷가지나 시장에 가서 사야 할 것들을 어딘가에 상세히 적어 놓곤 했다. 메모할 만한 종이가 없으면 신문 한 귀퉁이를 찢어서라도 반드시 적어놓곤 했으며 그 일을 마친 뒤에는 아무렇게나 버리곤 했다. 하루는 화장대 위에 잔뜩 어지럽혀진 물건들을 하나..

쥐를 잡자!

“여보~ 이걸 어떻게 하지?” 한쪽 손을 꼭 쥔 채 아내는 황급히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호들갑을 떠냐고 반문하니 아내는 날아가는 파리를 손으로 잡았는데 아직 손 안에서 살아 있다며 자신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말투로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고 있었다. “그냥 날려줘~”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지만 아내의 표정이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아마도 뛰어난 무예 실력을 무시당했다는 느낌도 있었을 것이고 또는 힘들게 잡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잡은 놈을 다시 살려준다는 것도 소득 없이 무슨 일을 했다는 본전 심리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절대로 그냥 놔줄 수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손으로 꼭 쥔 채 뜨거운 물에 푹 담그면 화상으로 죽거나 최소한 익사할 것이라고 말하려다가 정말로 행..

아기의 신발

“방금 신겼던 신발이 가면 어딜 가겠어?”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거죠” “분명히 신기기는 했어?” “그럼요. 두개 다 신겼는데…….” 외출을 앞두고 아내는 아이에게 신겼던 신발 하나가 없어졌다며 난리다. 막 걷기 시작한 아기여서 신발이라는 것이 단순히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을 넘어 순수한 본래의 역할을 할만하니까 이번엔 그 신발이 없어지는 일이 생겨 곤란하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내는 성격도 급한 편이다. 물론 그 급한 성격 때문에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늘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불편한 일도 있으니 말이다. 아내는 특유의 급한 성격 때문에 몇 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우선 ‘매직 아이’라고 불리우는 이상스러운 점박이 그림을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쉬운..

힘의 개념

“아기가 왜 울어?” “풍선을 불어주다가 그만 터져 버렸어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더니 아기가 무척 놀란 듯한 얼굴로 울고 있다. 엄마가 불어주는 풍선을 보고 깔깔대며 재미있어 했을 텐데 이것이 그만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터져 버렸으니 황당과 당황과 놀람, 그리고 심한 배신감이 한 번에 몰려왔던 모양이다. 아내는 아기를 달래려고 번쩍 안는데 그 폼이 자연스러우면서 너무도 당당했다. 하긴, 아내가 무엇인가를 들을 때 한 번도 힘들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요즘 풍선은 질이 안 좋은가 봐요?” 아내가 불쑥 내게 말을 건넨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단순한 불량품일 수도 있겠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아내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계속 풍선을 원망하고 있었..

“그러니까 생선을 날로 먹는 그 ‘회’를 말하는 거죠?” 아내와 함께 동네 시장의 생선을 파는 곳을 지나다 문득 생선회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내는 어린 시절을 산골에서 보내서 그런지 해산물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생선회 같은 음식은 참으로 같이 먹기 힘든 음식인 셈이다. 그런 입맛을 가진 아내는 자주 오는 시장이지만 회를 어디서 파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었던지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했다. 그러더니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따라가 보니 그곳은 생선회를 파는 식당이었다. 식당은 비싸니 집에서 먹을 수 있도록 생선을 회로 만들어 파는 수산물 센터 같은 곳을 찾는 것이었는데 잘 모르는 아내는 이곳으로 앞장 섰던 것이다. 그리 썩 잘 한..

자장가

“아니, 무슨 노래 가사가 그게 뭐야?”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아내에게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대답한다. “노래가 반드시 그 가사로 불러야 한다는 법은 없다구요. 게다가 아기에게는 반복되는 것보다 가끔씩 창의력이 동반된 내용이 필요하다구요” 그것이 바로 아내의 논리였다.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잠시 신중하게 생각해보았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응용도 좋고 창의도 좋지만 그래도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고 있었다. 아내가 아기에게 불러준 노래는 이랬다. ‘우리집 강아지는 몹쓸 강아지~ 학교 갔다 돌아오면 깽~깽~깽 ........’ 복슬강아지의 ‘복슬’을 ‘몹쓸’로 바꾼 것은 운율의 동질성을 응용한 것이긴 하나 응용된 단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