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다다닥~”
네거리 모퉁이로 도는 버스가 보이기 무섭게
아내는 이미 도루를 시작한 이종범 선수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버스를 탈 때 버스를 타려는 사람이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항상 일등으로 탄다.
아내가 버스를 일등으로 타는 목적은 당연히 앉아서 가겠다는
젊은 사람답지 않은 불건전한 의도였고,
항상 일등으로 버스를 타는 이유는 탁월한 위치 선정 능력과 불타는 투지,
그리고 압도적으로 우위를 보이는 뛰어난 몸싸움 능력이라는
3박자를 고루 갖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뛰면 나도 뛰어야만 했다.
아내는 일등으로 버스에 오르면 항상 맨 뒷자리에 큼직한 엉덩이로
두 사람 몫을 차지하고 있다가 뒤늦게 내가 타면 자리를 만들어 줬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뒷좌석 두 자리 정도를 차지하고 옆으로 길게 누운 채
내가 타는 것을 기다리곤 했다.
누군가가 거기 앉겠다고 비키라고 하면 끝까지 못 들은 척하며
내가 올 때까지 버텼다.
나중에 사람 많은 데서 그 자리에 앉으려면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니어서
아내가 버스를 타려고 뛰기 시작하면 나도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부지런히 뛰어야만 했던 것이다.
서울 명동의 롯데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타 본 사람이라면
그곳이 버스 한 대가 올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려고
움직이는 곳인지 알고 있다.
노선의 기착점인 동시에 시발점인 그곳은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50여 명까지 한 번에 버스를 타려고 움직이는 곳이다.
하지만 아내는 을지로 쪽에서 좌회전 하는 버스의 번호를 잘못 본 모양이었다.
우리집으로 가려면 161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161이라는 숫자와는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상한 번호의 버스를 향해
아내는 평소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고,
잘못된 번호를 확인한 나는 멀찌감치 서서 아내가 실전을 대비해서
워밍업을 하고 있거나 또는 현지 적응 훈련을 하고 있으려니 생각하고
천천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아내의 행동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이 번호를 잘못 본 사실을 계속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늘 하던 대로 이제 막 일등으로 타려는 위치에 서서 버스에 올라 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아니 저 아줌마는 뭐야?”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내는 버스의 출입문 앞에서
양손으로는 문 양쪽에 있는 가늘고 기다란 봉 모양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 발을 첫번째 계단에 얹어 놓은 채 사람들이 아무도 타지 못 하도록
입구의 문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처음 보는 새로운 전술이었다.
그 동안은 몸만으로도 충분히 일등을 했는데 그것도 경험이 쌓이니
지형지물의 활용까지 가능한 전술적인 발전도 있었던 것 같았다.
또한 그 힘은 몹시도 대단한 것이어서 뒤에 서 있던 약 50여 명의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버스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천하장사 이만기가 오기 전까지는 누구라도
그 차에 오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계속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 남편 올 때까지는 아무도 못 타!”
난 차라리 버스 번호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여기기 시작하며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 그 차 161번 아냐~”
그 이후로 아내가 버스를 일등으로 타는 방법에
새로운 능력 한가지가 추가되었다.
예리한 관찰력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이로써 아내는 대한민국에서 - 아니 전세계에서 - 버스를 가장 먼저 탈 수 있는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게 되었다.
이를 축구 선수에 비교하면 뛰어난 체력과 스피드에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탁월한 경기 감각까지 지니고 있는 셈이었으며,
바둑 두는 프로 기사로 말하면
조훈현의 빠른 행마와 유창혁의 무서운 전투력,
그리고 이창호의 완벽한 끝내기에
조치훈의 승부 근성까지 갖춘 경우일 것이고,
가수로 말한다면 뛰어난 가창력에 충분한 끼, 그리고 멋진 외모까지 받쳐주는
경우일 것이며,
사기꾼에 비교한다면 청산유수 같은 달변에
누구든지 속아 넘어가는 연기력,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뻔뻔함마저 갖춘, 한 마디로 완벽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내는 달리는 버스의 정차 지점을 예상하여
미리 달리기 시작하다가
버스 번호를 잘못 봤을 경우 주위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겸연쩍은 상황이
발생하므로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까지 했었다.
그 준비란 다름이 아니라 뛰어가는 도중에라도
버스 번호를 잘못 보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일단 그대로 계속 뛰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보면 다른 용무로 뛰는 줄 알도록…….
정식으로 아내의 그 능력을 인정해 주는 기관이나 단체는 물론 없었지만
어쨌든 아내는 내가 인정하는 이 부문의 세계챔피언이 되었다.
이제 아내는 어떤 일로 어딘가를 갈 때 빈 자리 하나만 있는
어떤 버스를 타게 되더라도
그 자리는 이미 아내의 자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시간이 흐른 뒤 내가 사무실을 옮겨
자동차가 쓸모없이 되는 바람에 그후로부터 아내는
내가 타던 차를 타고 출퇴근 하고 있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