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는 이렇게 변명하면 괜찮지 않겠어요?”
아내는 모든 일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항상 그것에 대한 그럴 듯한 변명 몇 가지를 미리 준비해 놓고
이를 연습하곤 했다.
아내와 같이 차를 타고 약간 먼 곳에 있는 창고형 마트에서
이것저것 생활용품을 사고 오는 길이었는데
안전띠를 매는 것을 몹시도 귀찮게 여기는 아내가
불쑥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뭐라 할 건데 그래?”
“임신했다고 하면 간단하지 않겠어요?
설마 임산부한테 안전띠 안 매었다고 딱지 끊지는 않겠지…….
배도 이만큼 나왔으니 그럴 듯 하지 않아요?”
언뜻 황당무계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론 그 많고 많은 변명 중에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아내의 상황 대처 능력이
감동적인 것을 지나쳐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순간은 결혼하고 처음으로
스스로 배가 나왔다고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참 우습다. 아내의 그 성격이 말이다.
그냥 안전띠를 하고 있든가 하기 싫어 안 한다면 벌금을 내도
할 수 없는 일일 텐데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미리 변명거리까지 준비하는 아내가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이번 경우만 아니라
평소에도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이와 비슷한 경우에도 그 경우에 해당하는
아주 적절한 이유 한 가지씩을 늘 준비하고 있었다.
돈을 아직 주지 않은 세탁소 앞을 지나갈 때,
자주 가던 가게가 비싸다고 옆 가게에서 콜라를 사오면서
그 가게 앞을 지나칠 때,
다른 채널에서 축구 중계하고 있는데 아내는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서
내가 ‘다른 데는 뭐 하나?’라는 말을 막 하기 전 등
항상 누군가의 질문을 미리 예상하고 이에 대한 절대적이면서도
가장 적절한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내게는 그리 익숙치 않은 일이어서
늘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예전에 아내와 비슷한 상황에서
무언가 변명에 해당하는 말들을 준비하며
무슨 일을 했었던 한 가지 일이 기억났다.
* * *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 년에 한두 번씩 몹시도 귀찮게 여기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채변 검사를 하기 위해 나눠준
채변 봉투를 채워 오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어찌하여 당시에는 그 일이 그리 힘든 일처럼 여겨졌는지,
엄청난 각오와 비장한 정신 자세를 가져야만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날도 겨우 대업(?)을 달성하고는 스스로 뿌듯한 나머지 문제의 그 봉투를
한참이나 감동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나 바라봐야 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봉투를 어디에 보관해야 할까’ 하는 고민으로
작년 이맘 때 같은 학교에 다니던 여동생이
알맹이(?)만 훔쳐간 일이 있었기에
올해도 또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저런 생각으로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채변 봉투 뒷면에 쓰인
주의 사항을 무심코 읽었는데 거기에는
‘채취한 변을 밤알 크기로 비닐 봉투에 담아서 밀봉하세요’라는 문장이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졌다. 왜냐하면 밤알 크기에 비해
너무 작은 양을 담았기 때문이었고
혹시나 그것 때문에 다시 이 일련의 과정을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눈앞이 깜깜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성공한 건데 이제 와서
밤알 크기로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아쉽게도 푸세식 화장실이라고 불리던 재래식 화장실엔
아무런 잔재도 남아 있지 않았고
바로 전날 그 직업에 종사하는 어떤 아저씨가
동네 창피하게 큰 소리 쳐가며 한바탕 청소를 해간 뒤라
그 목적물이 있는 곳까지는 너무도 깊기만 했었다.
그로부터 다음 날 학교에서 채변 봉투를 걷는 시간까지
나는 나름대로의 변명을 준비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지금의 아내와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있었을 게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나는 그저 말뿐인 변명이었고
아내는 신체적 특성을 이용한 변명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내가 생각한 그 변명이란 ‘밤알’ 크기를 ‘밥알’ 크기로 보았다고
소신 있는 표정으로 끝까지 우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이라는 것은 크기가 품종별로 너무도 다양하여
그 표준치가 산정되지 않으나 밥알이라는 것은 어느 집이나, 어느 쌀이나
그 크기가 대부분 평균 10% 안팎의 오차밖에 나지 않는 일반적인 것이므로
관례상 밥알로 보는 게 당연하다는 이론적 무장을 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밥알’을 ‘밤알’로 잘못 인쇄했다는 초등학생답지 않는
정치적 변명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위안이 되어서 조금이나마 맘이 편해질 수 있었다.
변명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이런 커다란 장점이 있다는 것임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 일 없이 채변 검사는 지나가 버렸고
나는 우리 반에서 회충약을 받은 오직 2명 중 한 사람이 되었지만
나의 그 변명은
그후로 매번 채변 검사 때마다 적절한 위안으로 활용되곤 했었다.
* * *
아내는 운전석 옆 자리에서 어느덧 잠이 들었다.
가만히 옛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참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집 근처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길 한복판에서 한 교통경찰이 내가 타고 있는 차를 가로 막았다.
운전석 쪽의 창문을 내리고 경찰과 몇 마디 오가는 사이에
자고 있던 아내가 깼다.
잠에서 깬 아내는 놀라기도 했고 정말 예상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아무도 말릴 틈 없이
여태껏 준비하고 연습한 말들을 쉴 새 없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평소에 준비하고 있었던 변명이라곤 하지만
아내의 말투는 엄청나게 빨랐고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논리 또한 정연했을 뿐 아니라 약간의 애교와 읍소까지 포함하고 있는
거의 완벽한 변명이었다.
준비된 말을 모두 마친 아내는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경찰관과 나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경찰관은 침을 흘리며 잠을 자던 아줌마가 갑자기 깨어서
마치 영화배우가 대본을 외우는 듯한 말투로 떠들어대는 것이 이상했는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호 위반에 동승자 안전띠 미착용을 추가합니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