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전화

아하누가 2024. 6. 24. 00:59



   “참, 우리 결혼 시계 어디 있지?”

 

 

 


  케이블 TV 홈쇼핑 채널의 귀금속판매 프로그램을 언뜻 지나치며 보다가
  문득 결혼 시계가 생각나서 아내에게 물었다.
  워낙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 체질인데다

  정장을 할 일마저 많지 않은 직업이어서
  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예물시계를 찰만한 일도
  일년에 한 두 번밖에 되지 않아 문득 그 시계가 잘 있는지 궁금해졌다.

  생각난 일은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무지막지하게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아내는
  내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시계를 가지고 왔다. 
  

 

  “이런 시계가 멎어 있네?”
  “내 시계는 아직 잘 가는데요?”

 

 

  아마 전지가 다 소모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아내는 같이 샀지만

  아직도 잘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시계를 한번 흘낏 쳐다보더니
  무언가 신이 난 듯한 얼굴로 내게 말한다.

 

 

  “나는 계속 차고 다녀서 그런가 봐요.”
  “……?”

 


  살면서 가끔씩은 두뇌의 활동이 잠시 정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바로 이런 경우가 그 경우여서 한참 동안을 생각해야 했다.
  얼핏 듣기에는 참으로 그럴듯한 말인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하니 말도 안되는 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아내가 갑자기 시장에 다녀오겠다며
  가스렌지 위에 생선을 굽고 있으니 15분 후에 불을 꺼 달라며 말한다.

 

 

  “지금이 저 시계로 8시니까 8시 15분에 불을 끄면 되요. 참?
    저 시계가 5분 빠르니까…….  8시 10분이 되나?”
  “……!?”

 

 


  또 한참 동안을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5분이 빠르니까 8시 20분에 꺼야 하는지 아내 말대로 8시 10분에 꺼야 하는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결국 내 생각이 맞다고 결론짓고 8시 20분에 불을 껐고
  우리 부부는 까맣게 타버린 생선을 먹어야 했으며,
  아내 흉을 보려는 불건전한 의도로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다가
  내가 제일 혐오하는 닭대가리라는 듣기 싫은 놀림의 말을

  3개월 동안이나 들어야 했다.

 

 

  아내는 가끔 그런 얘기로 나를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하곤 한다.
  딱히 우스개말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말에 자신도 우스운지

  커다란 목소리로 한참이나 웃곤 한다.
  그러면서 항상 날 보고 엄청 웃긴다는 말을 곧바로 하곤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누굴 웃겼는데…….

  하지만 난 어느새 아내의 그 농담아닌 농담을 늘 기대하고 있었다.

 

 


            *          *          *

 

 


  어느 날 밤 늦게 집에 들어왔더니

  TV를 보던 아내가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다.
  눈물을 글썽거린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듣게 된다면
  굉장히 놀랄만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아내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란

  90%가 TV드라마 보고 흘리는 것이고
  나머지 9%는 하품을 하고 흘리는 것이니 그리 걱정스럽진 않았다.
  도대체 아내는 TV드라마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어? 6남매는 시간대 옮겼잖아?”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으니 아내는 드라마 6남매 때문이 아니란다.
  나는 잠시 기대에 찬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음에 할 아내의 말에 긴장하고 있었다.
  항상 이런 상황이면 의외의 대답이 나오곤 했으니까. 
  

 

  “전화가 안 걸리니까 눈물이 나.”
  “……?”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말이었다.
  여태껏 들었던 말중에 제일 비상식적이면서 가장 근거없는,
  그러니까 눈물과는 전혀 연결이 안되는 말이었다.
  아무리 성격이 급해도 그렇지 전화가 안걸린다고 눈물이 난다니…….
  하지만 그것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역시 아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인 것만 같다.
  왜냐하면 아내의 전화에는 많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          *          *

 


  아내는 내게 삐삐를 칠 때 한번도 제대로 된 전화번호를 누른 적이 없다.
  급하고도 단순한 성격과 꼼꼼하지 않는 성격이 절묘하게 맞물려
  항상 한 두 자리의 번호를 빠뜨린 채 번호를 누르거나 또는
  집 전화와 사무실 전화번호를 적당히 섞어서 삐삐를 치곤 해서

  호출을 받는 나는 항상 기억 속의 많은 전화번호를 근거로 하여

  뛰어난 유추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늦게 연락한다며 난리를 치곤 할뿐아니라
  가끔은 호출을 하고도 그 사이를 못 참아 자리를 비우곤 했다.
  아마도 특유의 그 급한 성격 때문일게다. 
   


  삐삐를 칠 때만이 아니다.
  다른 일로 전화를 할 때도 상대방 전화기의 벨이 5번 울렸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으면
  집에 없는 걸로 판단하고 포기해 버리곤 한다.
  물론 조금 있다가 다시 하려는 생각도 하고 있었겠지만

  단순한 아내의 성격은 그 사실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게 하곤 했다.

  이 몇가지 일은 내게 있어서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일이기도 했으며,
  또한 단순하고도 급하기 짝이 없는 아내의 성격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          *           * 
  

 

  무슨 일인가 TV를 슬쩍 쳐다보니 TV에서는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이라는
  특집 프로가 한창이었다. 잠시 머쓱해졌다.
  화면 아래 부분에는 700으로 시작하는 국번의 전화번호가 나타나 있었는데
  한 통화 전화하면 1,000원의 성금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아내는 다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통화중인 모양이었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전화는 계속 통화중이었다.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 왔는데도 아직도 통화중이었다.
  무려 10여분이  훨씬 지나서야 아내는 겨우 한 통의 전화를,
  그리고 1,000원의 성금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린이들을 위해 전화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감동했지만 급하기 그지 없는 성격의 아내가

  무려 10분 이상이나 전화를 하려 했다는 사실에도 적잖이 놀랐다.

  무엇이 아내를 그렇게 끈기있게 전화를 하게 했을까.   

 

 

  그 시간 이후로 우리 부부는 아기가 자고 있는 방을
  1분 간격으로 번갈아 들어가 보고 또 들여다 보았다.
  어째서 같은 땅에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저 어린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눈물이 앞을 가렸다.
  굳이 성격이 급하고 단순하지 않아도 슬픈 것을 보고

  슬픈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방송이 끝날 때까지 우리 부부는 방송출연자들과 같이 울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야말로 정말 아무런 아픔없이 자랐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생각을 새삼스레 하면서. 


     

       *           *          *

 


  늦은 밤, 이미 잠든 아내는 혹시라도 놓칠세라 아들 후연이를 커다랗고
  두꺼운 팔로 휘감고 있다.
  한 통화의 전화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아내는 자면서도 손가락을 자꾸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 한 통화의 전화도 내게는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하다.
  물론 다른 사람의 전화와 다를 바 없는 한 통화의 전화였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리고 내가 느끼는 아내의 전화에는

  분명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었을테니 말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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