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의 비행을 거쳐 드디어 아프리카에 도착했다.
내 여행 계획으로는 50대가 되어서야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아프리카에
예상보다 훨씬 일찍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케냐의 대평원 한복판에서 뛰어다니는 기린과 사자,
그리고 좧동물의 왕국좩을 통해 미리 익혀 두었던 하이에나와 코요테,
톰슨 가젤 등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과는 달리 전혀 즐겁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행하고 떨어져 홀로 아프리카 초원의 미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코끼리 떼가 몰려온다.
황급히 자리를 옮기던 나는 마치 예정된 순서의 영화 장면처럼
발목을 다쳐 꼼짝없이 누워 있게 되고
그 위로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가 지나간다.
코끼리 발이 내 배 위로 올라온다. 숨이 막힌다. 몸이 터져 버릴 것 같다.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아직 살아야 할 날이 많이 있는데.
그래,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빨리 일어나서 쓰던 글을 마저 써야 한다.
하지만 커다란 코끼리에 밟힌 내 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으…….
갑자기 눈을 떴다. 꿈이었다.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고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배 위에는 커다란 아내의 다리가 올라와 있었다.
두 손으로 힘겹게 아내의 다리를 옮기고 땀도 식힐 겸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워 물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찌 이런 악몽이…….’
가만히 어제 하루를 더듬어 보니 저녁에 있었던 일이 심상치 않았다.
저녁 나절의 일이다.
직장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는데 아내가 옆에 바싹 달라 붙더니
여느 때와 다르게 아양을 떤다.
요즘 퇴근 후에 교양 강좌에 나가 건강과 의학에 관련된 강좌를 듣는다며
몇 가지 배운 것으로 건강 상태를 점검해 줄 테니 증상을 말해 달라고 한다.
말투를 보니 어지간히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며칠 동안 바빠서 늦게 들어 왔으니 그 동안 입이 간지러워 어떻게 참았는지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해서 흔쾌히 응하려는데
이미 나의 의사가 표현되기도 전에 질문이 쏟아졌다.
“당신, 화장실에서 응아 하고 그 현장을 봐?”
어째 식사 시간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식욕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볼 때도 있고 안 볼 때도 있고…….”
“그러면 그거 볼 때 한 덩어리의 길이가 빠나나 정도 돼?”
조금씩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느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생각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잘 기억이 안 나…….”
아내의 질문은 계속 쏟아졌다.
“그럼……. 굵기는 어느 정도야? 어린애 팔뚝 정도 돼?”
아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그와 관련된 상상은 하지 않으려고 다짐했지만
마침 내 손에 쥔 젓가락 끝에는 커다란 오이소박이가 들려 있었다.
오이소박이의 모습이 상상 속에서 기묘하게 변형되면서
나는 마침내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그래 이 정도다! 왜?”
들고 있던 오이소박이를 팽개치다시피 내려 놓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나의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쏟아낸다.
“그럼 그게 물에 떠? 가라 앉어?”
“그걸 누가 그렇게 자세히 보나?”
“그럼 색깔은 갈색이야 ? 황금색이야?”
“…….”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밥상을 밀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흥분이 쉽게 가라 앉지 않았다.
도무지 화가 나서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마침 눈에 커다란 TV 리모컨이 보였다.
‘이걸로……?’
문을 반쯤 열고 주방에 있는 아내를 향해 조준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망까기와 깔빼기 실력을 바탕으로
군대 시절 익힌 사격 솜씨를 가미해서 박찬호의 강속구로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엉덩이 부분을 겨냥하면 표적이 워낙 크므로 실패는 없다는 계산을 하면서.
하지만 결국 던지진 못했다.
그때 마침 토마토를 썰고 있던 아내의 손에 들린 커다란 칼이 보였고
리모컨을 던지면 칼로 되돌아 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시간이 조금 지나니 미안하기도 했다.
직장 다니랴 살림하랴 바쁜 시간에도 건강 의학 강좌를 찾아다니는
대견함이 그랬고 또 무언가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성의가 또한 그랬다.
머쓱해진 표정으로 아내가 있는 방에 들어가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애완 동물과 가축의 구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아내의 손에
고슴도치 한 마리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고슴도치가 아니라 손에 바늘이 잔뜩 꽂혀 있었다.
나는 황급히 물었다.‘고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며 이름은 무엇이며,
또한 어디서 구했는지를 소상히 밝히라’고.
아내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명쾌했다.
‘요것은 건강을 위한 의학 도구로 이름은 수지침이요,
강좌에서 단체로 구입했다’라고.
1차적 의문은 간단히 풀어졌지만 2차적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근데 왜 그게 당신 손에 꽂혀 있지?”
“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이미 해 버렸으며, 마주쳐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눈이 마주쳤다. 저 눈빛은 분명 먹이를 찾아 헤매는,
동물의 왕국에서나 볼 수 있는 굶주린 하이에나의 바로 그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바라는, 평소의 아내답지 않은 애처로운 눈빛임이 분명했다.
‘건강에도 좋다는데……’라며
애써 발상을 전환키로 하고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생각한 것보다 아프진 않았는데 꽤 따끔거렸다.
그리고 손바닥에 꽂아둔 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좀도 쑤시고
손바닥도 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괴로웠던 것은 침을 찌르며 하는 아내의 말 때문이었다.
아내는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여기가 아닌가? 여긴가? 저긴가? 아파요……?”
내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그 수지침은 어제 사서 오늘 두 번째로 찔러보는 것이라는 사실이 그랬고,
급기야 안내 책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책을 뒤적거리며
여기저기 찔러가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한 가지 있었다.
수지침이란 것은 다행히도 자기 손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희망마저도 몇 분을 버티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엔 아내의 손에 소주잔이 잔뜩 들려 있었다.
‘이제 음주 진료까지?’ 하며 공포에 떨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그건 소주잔이 아니라 ‘부항’이라는 것이었는데
주로 등쪽에 시술을 하는 것이라 스스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잠시 후 나는 윗도리가 강제로 벗겨진 채
침대에 엎드려 괴로워 하고 있어야 했다.
내 처지가 불쌍했고 조여오는 등허리의 고통이 또한 그랬다.
차라리 목욕탕에서 한 번 밀린 등짝을 또 한 번 밀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아내는 공기의 압력을 이용하는 ‘부항’의 기본 원리를 모르는지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질렀던 인간의 생체 실험에 대한
만행을 규탄했으며,
나치에 당한 유태인들의 슬픔도 느껴봤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기 잘 쓰는 ‘안네’의 얼굴도
억지로 상상해서 떠올렸다.
한편으론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수술 도구나 마취 도구가 아니었던 사실을.
* * *
어느덧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들어 갔다.
조심스럽게 다시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나는 쥐라기 공원에 가고 싶었던 꿈을 산산히 깨버리고 있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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