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조건반사와 무조건반사

아하누가 2024. 2. 21. 19:51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항상 욕실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빨래통에 넣는 것이 아니라 변기를 향해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가끔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벌어지는 일일 행사다.

    외부 자극에 의한 사람의 반응에는 세 가지의 일차적인 반응이 있다 한다.
    무릎을 때리면 발길질을 하는 무조건반사와
    먹을 것을 보고 침을 흘리는 조건반사,
    그리고 밥 먹을 때마다 종소리를 들은 강아지가 종소리만 듣고도
    밥을 주려는 줄 알고 꼬리를 미친듯이 흔들어대는 학습이란 것이 있다. 
     


    그러니까 평소 나의 행동을 자세히 구별해 보면,
    지하철에서 조금 예쁘다 싶은 여자가 서 있으면 어느새
    그 옆 자리로 자리가 옮겨져 있는 것은

    먹을 것을 보고 침을 흘리는 것과 같은 조건반사임이 틀림없고,
    술자리에서 누군가로부터 ‘이제 그만 일어나자’라는 말을 들으면
    술값 안 내려고 슬그머니 화장실로 자리를 옮기던 일이 몸에 굳어져서
    시도 때도 없이 누군가가 ‘이제 그만 일어나자’란 소리를 하면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지는 것은 학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저녁에 집에 들어와 욕실에 들어가 입던 옷을 벗어
    아무 생각없이 빨래통이 아닌 변기통으로 던져버리는 것은
    무조건반사란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된다. 
     


    이 문제는 하루에 한 번씩 나를 갈등에 빠지게 하는

    쓸데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변기 속에 던져진 옷을 다시 빨래통을 넣는 과정은 아무도 없는
    화장실 특유의 밀폐적 특성 속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내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는 혼자만의 비밀일 뿐이라는 것이다.

    욕실에서 나와 아내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내일은 회사에서 전 직원이 1박 2일로 단합대회 형식을 빌려

    놀러 가는 날인데, 이런 경우에는 분명히 잘못한 일도 없고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행사임이 분명한데도

    눈치는 더욱 조심스럽게 봐야 한다. 
     


    마침 아내는 무슨 TV 프로가 그리 재미 있는지 눈을 뗄 줄 모른다.
    슬며시 다가가서 쳐다보니 무슨 코리안지 무슨 모델인지 하는
    미인선발대회가 한창이었다.     
    아내에게 넌지시 말했다. 
     


“무슨 이런 쓸 데 없는 걸 봐! 뉴스나 보자구!”
“안 돼욧!!! 내가 찍어둔 여자가 일등 하는지 안 하는지 봐야 해욧!!”      
     


    혹시나 해서 맘에 없는 소리를 한 건데

    아내는 나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모컨만 꼭 쥐고 있다. 
     


    정말 행복한 하루다.
    살다보면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이런 날은 시쳇말로 기분이 째지기 마련이어서 고스톱을 치면
    돈을 왕창 딸 것도 같고 은행에 가서 통장 잔액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없는 돈 5만원이 입금되어 있을 것만 같다.
    또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자마자 타려는 지하철이
    텅 빈 모습으로 기다려 줄 것만 같은 끔찍하게 좋은 기분이 든다.
    내일은 공식적으로 하루 나가서 놀아도 되고
    오늘은 이렇게 공식적으로 TV 화면을 보며 껄떡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그 동안 그 놈의 방심이라는 것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당하지 않았던가?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한 번 더 눈치를 살폈다.

 

 

      “여보! 내일 회사에서 교육가는데 짐 좀 챙겨줘…….”     
      “요거 마저 보구요!!!” 
     


    조금은 신경질적인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몹시 흡족했다.
    이제는 아예 자리를 잡고 TV를 보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아내는 한 술 더 뜬다. 당신도 저 중에 한 명 찍어보라고.
    신이 나서 하마터면 <가요톱 10> 공개 방송을 구경간 여학생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괴성을 지르며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음……. 나는 6번이 될 것 같은데…….”

 

 

    가장 점잖으면서도 그리 관심없다는 말투로 말하자 아내는 바로
    자신의 의사를 말한다.

 

 

      “나는 1번이 될 것 같은데……. 주로 저런 스타일이 되더라구요.
        그리고 저 여자 영어도 잘하구…….
        요즘 세상은 국제화에 걸맞는게 최고야…… 최…….  근데?
        당신 입가에 그게 뭐지?” 
     


    이런…….
    아까부터 이상하던 내가 마치 조건반사의 반응처럼
    침을 잔뜩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입을 손으로 가리며 손가락을 입 속으로 깊숙이 넣었다.
    혓바닥 아래쪽이 아까부터 가려워 계속 긁고 있던 중이었다며…….
    혓바닥이 가렵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 특이 체질로 받아들여졌는지
    아니면 미인대회에 더 관심이 많았는지
    다행히 별 탈 없이 그 순간은 넘어갔지만 목구멍이 손가락에 찔려
    말할 때 마다 철사줄 엮는 소리가 나는 고생을 일주일 이상 해야만 했다. 
     


    TV 속의 미인대회는 어느덧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었다.
    결과는 아내의 예상대로 1번이 당선되었으며
    아내는 마치 자신이 일등이라도 한 것인 양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거봐요! 내 말 맞죠? 내 눈이 확실하다니까……. 뭐라구? 6번?

    푸하하……. 여자보는 눈이 저렇게도 형편없… 없… 으…….”      
     


    아내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으며
    나는 슬며시 기지개를 힘껏 펴는 척하며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          *          *

 

 

 


    오랜만에 집을 떠나 야외로 나오니 기분이 상쾌하다.
    더구나 아내의 잔소리는 이미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기에는
    젊은 여직원들로 가득한, 월급이 포함되는 회사 업무의 연장 아닌가. 
     


    경기도의 어느 강변이었는데 그곳에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보트도 있어
    벌써 강에는 많은 남녀들이 쌍쌍이 유유자적 보트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의 비율상 경쟁률에서 우위를 가진 나는
    미인선발대회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의 관점으로 여러 명을 보다가
    몸무게 40㎏ 안팎으로 짐작되는 사람하고만 보트를 타기로 했다.
    그 이유는 보트가 뒤집힐지 모르는 안전 문제 때문이었고
    그것은 아내와 함께 탄다고 생각을 하니

    어린애 두 명을 더 태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트를 타고 서서히 강 한가운데로 노를 저었다.
    젊은 여직원이라 그런지 신이 나는 모습이 몹시도 앙증스럽다.
    장난기가 생겨 보트를 좌우로 흔드니 놀라는 모습이 또한 귀엽다 못해
    이 또한 조건반사의 반응처럼 다리까지 비비 꼬였다.
    다리가 꼬이니 쥐가 난다.
    다리에 쥐가 나는 일은 축구할 때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노를 젓다가도 쥐가 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쥐가 아니라 쥐 할아버지가 와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으며
    당연히 정신력으로 이를 가볍게 웃어 넘겼다.
    한 번은 너무 웃다가 등받이도 없는 자리에서 뒤로 넘어져

    물에 빠질 뻔하기도 했다. 
     


    신이 난 나머지 저으라고 있는 노로 운전은 안 하고
    물장난하듯 물만 첨벙대기 시작했다.
    물이 보트 안으로 들어오고 튄 물에 옷이 흠뻑 젖었지만 그리 개의치 않았다.
    옷이야 갈아 입으면 그만이지만 언제 또 이런 신나는 일이 있겠느냐는
    엉큼한 생각에 철없는 개구장이 마냥 물장난만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즐거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즐거움은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그 시간 이후 내내

    이유를 알듯말듯한 불쾌감으로 남은 일정을 보내야만 했다.
    보트를 타고 옷을 갈아 입으러 숙소로 돌아온 나는
    조건반사나 학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심술난 아내가 챙겨준 옷은 빨래통에서 다시 건진 것이었다.

     
    

 

 

 

 

 

 

 

 

아하누가

다시 읽어보니 참 보잘 것 없는 글이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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