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

아하누가 2024. 2. 21. 19:50

 


    “여보! 빨리 서둘러야 한번이라도 더 타욧!”

 

 

 

 

    아내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동네 놀이터에 놀러 나온 애들처럼 뛰어 다닌다. 
     


    여름 휴가를 맞아 모처럼 식구들이(식구라고 해야
    아내와 나 그리고 젖먹이 아들 녀석뿐이지만)
    강원도 홍천에 있는 스키장을 찾았다. 


    높은 산에 눈이 시원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보려는 나의 바람은
    비참하게 깨어졌다. 눈이 없었던 것이다.
    스키장이란 곳은 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뿌린다기에 계절에 관계없이
    스키장에 가면 당연히 눈이 있으리라는 나의 우매함이
    한편으론 에디슨이나 뉴튼에 버금가는 천재적인 사고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니 곧 창피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름철엔 스키 대회가 없었다는 기억이 선명하게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내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또 하나 나를 다행스럽게 한 것은 이전에 눈썰매장이 있던 자리에
    카페트 같은 것을 깔고 그 위에 물을 잔뜩 뿌려 놓아
    썰매를 즐기게 만들어 놓은 시설이 있었고,
    또 아내는 그 썰매 타는 일을 몹시도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보라 썰매’라고 표기되어 있었던 그것은 그리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또 유모차에 태운 아들 녀석도 있고 해서 아내만 타라고 하고는
    언덕 밑 도착 지점 정도에 자리를 잡고
    아들 녀석에게 엄마에 대한 흉을 보고 있었다. 
     


      “후연아! 엄마 엉덩이 엄청 크지?”

      “…….” 
    


    그렇지.

    이 녀석은 말을 아직 하지 못한다. 언제 커서 아빠랑 재밌는 얘기를 할꼬.

    갑자기 주위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곁에서 서성이던 아주머니 몇 분이 수근거리며
    힐끔힐끔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그들은 썰매타고 내려오는 아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내가 생각해도 저건 썰매가 아니다.
    몸무게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나가긴 하지만 저렇게 빠른 속도와
    강한 파워로 내려올 줄은 나도 몰랐다.
    동시에 출발한 약 20여 명의 선수들 중에서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밑에서 안전 관리를 하는 아르바이트 대학생들도
    신변의 불안을 느꼈는지 서둘러 몸을 피하기까지 했다.
    그 속도는 서울 외곽 지역에서 신도시 방향으로 가는
    총알 택시의 속도와 비슷했으며,
    산드라블록이 나오는 영화 ‘스피드’를 광고하는
    TV 광고의 분위기와 흡사했다.
    한편으론 고삐 풀린 망아지라는 옛 속담에 등장하는 표현도 불현듯 생각났다.

 

    도착 지점에 다다를 무렵, 아내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더니
    썰매를 뒤로 한 채 골인 지점까지 몸으로 굴러왔다. 물론 그래도 일등이다.
    쑥쓰러운 듯 일어나며 멋적은 듯 웃는데 넘어지다가
    바닥에 부딪혔는지 팔꿈치에선 피가 뚝뚝 떨어진다.
    표정을 보니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는 내가 서 있는 쪽을 쳐다보며 손을 흔든다.
    이런 경우는 참으로 곤란하다.
    손을 흔드는 쪽 보다 흔들림의 대상이 되는 쪽이 더 창피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의도적으로 피한 사실이 드러나면 맞을까 봐.

    주변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내게 묻는다.

 

 

      “아는 사람이유?” 
     


    순간 아찔했지만 그렇다고 차마 모른다고 할 수는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아~ 저 사람이요? 수상스키 선수래요.”

 

 

 

    가끔 무슨 말을 생각없이 하고 나서 돌아보면 참 멋진 표현이었다고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 표현은 아쉽게도 중요한 결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상황에서 발휘되곤 한다.
    이 또한 그런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상당히 절묘한 표현이었다.
    하긴 저것을 누가 썰매라고 하겠는가? 수상스키지.

 

 

 

 

                *           *          * 

 

 

 


     
    서둘러 유모차를 끌고 자리를 옮겼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물보라 썰매장 매표소에서 입장표를 받는
    아가씨를 보게 되었다.
    예쁘다. 아니 예쁘다기 보단 귀엽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 아가씨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그리 밝지 않은 표정을 하더니
    이내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들 녀석에게 눈길을 보낸다.
    아기를 보고 조금 밝은 표정을 짓는 듯했으나 

    아직도 표정이 밝아지지는 않았다. 
     


      “아유~ 이뻐라. 아드님인가 보죠?”

 

 

    잠시 머뭇거리다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라뇨? 무슨 말씀을……. 동생이에요.”

 

 

    놀란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그 아가씨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내게 말했다.

 

 

      “네? 에이~ 농담두…….”

 

 

    이런 경우는 끝까지 우겨야 한다.
    또한 이왕 우기기 시작한 것을 중간에 인정하면 더 망신만 당한다.
    따라서 이왕 벌어진 일 무조건 우기기 시작했다.
    동생이 아니라 조카쯤으로 시작했으면 조금 편했을 거라는
    막심한 후회도 들었다.
    다만 아들 녀석이 아직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 커다란 위안이
    되고 있었다. 
     


    반신반의하고 있는 매표소 아가씨하고 아들 녀석, 아니 동생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 하고 있는데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어느 여자가
    표독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인상은 캔디 만화에 나오는 이라이자로 대표되는,
    인기 만화나 소설의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역할의 등장인물 같았는데
    썰매 타다가 넘어져서 다쳤다나 어쨌다나,
    그래서 환불을 받아야겠다며 마치 콩쥐팥쥐의 콩쥐로 대표되는
    주연급에 해당하는 스타일의 매표소 아가씨에게 신경질을 내고 있다.
    가만히 보니 팔꿈치가 조금 까진 정도였다.
    저것도 상처라고 따지러 오는 거 하며,
    또 그걸 표 받는 매표소 여직원한테 와서 따지는 멍청함하며……. 
     


    당황해 하고 있는 매표소 아가씨를 대신해 관리실에 가보라고 일러 주었다.
    물론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멋져 보이는 목소리로 말하며
    만화나 영화의 여주인공을 도와주는 멋진 남주인공의 표정을 짓는 것을
    그 틈에도 잊지 않았다.

    그 여자가 떠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모습이 너무도 추해 보였다.
    주의가 당연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안전 수칙도 무시하고 다친 것을
    시설 탓으로 돌리는 이기적인 사고.
    그리고 즐거운 곳에 와서 인상을 꼭 찌푸리게 만드는 추악함……. 
     


    순간 썰매장에서 구르면서도 깔깔대며 즐거워하는 아내가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역시 여자는 힘 세고 볼 일인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니 예쁜 매표소 아가씨가
    몹시 고마운 얼굴로 말을 건넨다.
    문득 생각나는 사실은 아마도 내가 맘에 드는 여자와
    이렇게 호의적인 얼굴을 하며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인 것 같다는 현실이었다.

 

 

      “저~ 고마와요.”

      “고맙긴요…….” 
     


    그리고 주변을 잠시 둘러본 그 아가씨가 내게 물었다. 
     


      “저~ 저기 오시는 분도 일행인가 보죠?”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니 불행하게도 이제는 지겹다는 얼굴로
    썰매를 반납한 아내가

    아들 녀석 이름을 부르며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저 분이요? ” 
     


    순간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 분은 우리 엄마예요.”

    

 

 

 

 

 

 

 

 

아하누가

어째 이야기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