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빨리 저녁 드세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에 들어온 어느 날 저녁,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저녁을 먹으란다.
보통 때와 달리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 이유를 물었더니
맛있는 디저트를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제로 먹이다시피 두 공기를 먹게 하고는 디저트를 내온다.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다가 난 그만 실색을 하고 말았다.
디저트는 과일도 아이스크림도 아닌,
국내 모든 요식업소에서도 디저트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냉면이었다.
그것도 분식점에 가면 세 그릇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양의.
잠깐 아내의 식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내는 힘이 센 만큼 음식도 무척 많이 먹는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큼의 양을.
언젠가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1개, 리브샌드 1개,
해시 포테이토 2개를 먹고
그리고 치킨을 먹다가 맛이 없었는지 치킨은 역시 치킨 전문 패스트푸드라며
바로 다른 패스트푸드 매장으로 달려가
치킨 3조각에 핫윙 5개, 비스킷 하나에 콘샐러드 2개(내 것까지)를 먹더니
만족한 듯 ‘꺼~억’ 트림을 했다.
이런 사람 옆에 앉아 있으면
옛날 변웅전 아저씨가 호탕한 웃음소리로 진행하던
<묘기대행진>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그 방송에서 엄청나게 많은 우유를 마시고 날계란 100여 개를
가볍게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그 사람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아내 역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차라리 그것까진 좋았는데 더욱 놀라운 일은
쇼핑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저녁을 먹자는 것이다.
아내는 쌀로 지은 밥 외의 것은 밥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 난감했다.
차라리 먹기 위해 사는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지 사춘기 시절의 고민을
오랜만에 한 번 더 해보는 것이 더 속이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이론은 늘 이러하다.
즉 밥 이외의 것, 예를 들어 라면, 자장면, 냉면 같은 면류,
또 빵, 피자, 떡볶이 등의 밀가루로 만든 음식,
그리고 감자, 고구마, 옥수수, 삶은 계란 등등의 음식도
아내는 간식의 범주에 해당시킨다.
그러니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것들은 단지 간식일 뿐이고
그래서 끼니를 때우려면 밥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실 옆 자리에서 일하는 윤차장도 그런 체질이어서
한편으로는 어렵지 않게 이해를 하면서도 또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다면 과자나 과일, 음료수 등은 뭐라고 정의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조심스레 아내에게 이 궁금증을 물으니 아내는 주저없이 간결하고도
명쾌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로 답한다. 껌이라고.
* * *
냉면을 먹으며 생각한다.
식욕이 없는 여자들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또는 몸매 조절한다며 쓰리는 속을 움켜쥐고 음식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무모한 여자들보다도 훨씬 아름답지 않은가?
또 식성이 까다로워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쳐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는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여자들보다
비록 몸매는 못 따라줄지언정 보신탕집에서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국물까지 마셔대는 아내가 오히려 훨씬 보기 좋지 않은가?
우리집 냉장고는 음식으로 늘 부족함이 없다.
항상 넘치는 음식들이 비록 식성이 좋지 않은 나지만
항상 여유로운 포만감에 젖게 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항상 식사 때면 상 바닥의 색상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상 위는 음식 그릇으로 가득하다.
가끔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부럽다는 찬사가 계속 나오고
따라서 음식 그릇으로 가득한 밥상은 아내 자랑을 하는 멍청한 짓을 할 때
주로 등장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했으며
아내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 *
냉면은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것을 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만 생각된다.
차라리 냉면 30그릇 담은 철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아파트 16층에 배달하거나
냉면으로 유명한 오장동까지 토끼뜀으로 뛰어갔다 오는 일이 훨씬
쉬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먹다 말면 성의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시달릴 테고.
어디선가 누군가 나타나 나를 구해주면 좋으련만…….
마침 다단계 판매회사에 다니는 친구 한 녀석이 뭐 필요한 거 없나며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
역시 필요한 사람은 항상 만화의 주인공처럼 바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또한 만화의 주인공처럼 나타난 그 친구가 그렇게 반가웠던 것도 처음이다.
사실 그 친구가 가끔 필요도 없는 물건을 떠맡기듯 팔고 가서 그렇지
그리 나쁜 친구는 아니다.
생필품을 사러가는 노동을 줄여주기도 하니
가끔은 편하다는 생각도 하던 친구다.
친구는 힘겹게 냉면 먹는 나를 이리저리 훑어본다.
난 반가워 하며 접대용 인사말이 아닌 진실한 제안을 했다.
“같이 먹을래?”
“아니, 점심에 냉면 먹었더니…….”
“…….”
역시 이 녀석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도와주지 않는다.
사실 이 녀석은 그리 좋은 놈이 아니다.
남이 무슨 치약으로 이를 닦든 소금으로 이를 닦든, 아니면 본드로 이빨을 닦든
지가 신경쓸 일이 뭐 있다고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만 하는 친구다.
먹는 둥 마는 둥 이리저리 젓가락만 휘젓고 있는데
친구는 내게 매우 충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넌 왜 커피 마시는 찻상에다 밥을 차려 먹니?”
“!”
그렇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집 밥상은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자꾸 나왔다.
이러다가 한 일 년 지나면 어린이들의 소꼽 장난에 쓰이는
밥상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난 아내를 원망하지 않는다.
어쨌든 밥상은 꼬박꼬박 가득 채웠으니까.
텅빈 커다란 상보다 비록 작은 상이라도 무엇인가 듬뿍 채워진 것이
훨씬 풍요롭지 않은가?
아하누가
그 밥상은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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