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화들짝 놀라며 아내에게 물었다.
“보면 몰라요? 아기 그네 태우잖아요?”
“그래도 그렇게 세게 흔들면 어떻게?”
“뭐가요? 아기는 좋아하고 있는데…….”
어린 자녀가 있는 집에는 대부분 방문 양쪽 벽에 고정시켜 매달아 놓은
어린아이용 그네가 있다.
우리 집에도 그네가 있어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돌보기에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힘센 마누라가 흔들어주는 그네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천장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일 정도로 앞뒤로 흔들리는 폭과 속도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바이킹과 청룡열차를 섞어 놓은
탄력과 파워라고나 할까?
바이킹이나 청룡열차는 직접 타지 않고 남들이 타는 것을 보면
그리 무서워 보이지 않는데 저 그네의 움직임은
밖에서 보기에도 겁이 나니 그네에 타고 있는 죄 없는 당사자는
얼마나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을 것인가?
아내 눈에는 아기가 즐거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얼굴로 보인다.
아마 이 녀석도 말 못하는 아기지만
혹시나 즐거워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 이 힘센 엄마는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더욱 세게 밀지도 모른다는
잔머리류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억지로 즐거운 척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리려다가 그냥 참기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아기한테 못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 * *
이 녀석이 백일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방에서 귤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는데 이 녀석이
방실방실 날 쳐다보며 웃었다.
마침 아내가 시장에 간다며 잠깐 자리를 비운 터라
이 녀석에게 먹고 있던 귤을 입에다 조금 짜 주어 보았다.
귤 맛을 본 아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 표정이야말로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압권이었다고나 할까?
예전에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 그린 망고라는 과일을 먹고
나도 그런 표정을 지었었다.
그리고 누군가 저런 표정 짓는 것을 봐야 그 악몽에서 벗어날 것만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는데 이 녀석 표정을 보니
그 막연한 생각은 참으로 정확한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조금 더 자극적인 맛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시간을 이용해 그 묘한 표정을 지켜보고
방바닥을 구르면서 낄낄대며 웃곤 했다. 방바닥을 구르면서 웃는 일은
중학교 2학년에 끝내야 한다는 평소의 연령 적용 기준이
20년이나 연장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이 녀석이 침을 흘리기 시작했을 때
토마토를 갈아서 숟가락으로 떠 먹였다.
처음에는 그 묘한 표정을 짓는 듯하더니 이내 맛이 들었는지 제법 잘 먹었다.
잘 먹으면 분명 안 되는 순간인데 잘 먹고 있으니
괜시리 잘 먹고 있는 아기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갑자기 불효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이내 토마토 공급을 중단하고 다른 과일을 찾았다.
냉장고를 기웃거리다 쾌재를 불렀다. 자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기가 먹기 좋게 열심히 갈았다.
숟가락으로 한 입 물려주자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환상적인 표정이 나왔다.
연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연령 적용 기준의 재설정이 몹시도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 번 더 하며
웃다가 곧 두 번째 숟가락을 물리니 아기는 고개를 돌린다.
잠시 당황했지만 빨리 참외를 하나 깎아서 믹서에 갈았다.
그리고는 참외 한 숟갈, 자두 한 숟갈을 번갈아 입에 물렸다.
이 녀석은 거의 정신이 없는 듯했다.
자두로 인해 참외 맛이 더욱 달게 느껴졌겠지만
참외로 인해 자두 맛은 또한 더욱 신맛이 강해졌을테니 말이다.
막 집에 돌아온 아내는 그러한 모습이 자상한 아빠의 모습으로 보이는지
흐뭇하다 못해 감동적인 표정을 지었다.
표정 관리를 포함하여 증거 인멸, 알리바이 입증 등
조심스럽게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날 밤은 설레임으로 잠을 설쳤다.
다음날에 레몬을 사다 갈아줄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기와 둘이 있게 된 나는 적당한 요릿거리를 찾았지만
마땅한 게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쉽다. 이 녀석에게 세상의 쓴 맛도 느끼게 해 줘야 할 텐데…….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한줌도 되지 않는 아기 손을 꼭 잡고 힘을 모아 손목까지 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손목을 꼭 쥐고 있으니
이 녀석의 손바닥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서서히 손목 잡은 손에 힘을 풀면서
남은 한 손으로 하얗게 돼버린 손바닥 위에 원을 그렸다.
어렸을 때 누나들에게 자주 당하던 일명 ‘전기태우기’였다.
그랬더니 이 녀석은 자두의 그것과는 다른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당황한 얼굴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처음 보는 새로운 표정이었다.
성취감에 젖은 나는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즐거워하다
돌아온 아내 때문에 잠시 근엄한 얼굴을 하는 척 하곤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남은 성취감을 즐겼다.
그나마 이 정도면 점잖은 수준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4살 되던 해 머리맡에 켜두는
취침용 스탠드의 전구가 들어가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시킨 적도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던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기의 맛을 보게 되었다.
그때 전기를 한방 먹은 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으며
국내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최연소 가출 기록을 세울 뻔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아내는 아기를 재밌게 해주려고 바이킹 태우지만
나는 내가 즐겁자고 전기 태웠으니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 * *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모자가 똑같은 자세로 한 선풍기 바람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이 녀석은 참 운도 좋은 놈이다. 힘센 엄마를 만났으니 말이다.
어서 빨리 튼튼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이 녀석도 어른이 되면 아마도 늘씬하고 몸매 좋은 여자보다
팔뚝이 두꺼운 여자가 훨씬 아름답게 보일 게다.
그때는 미의 기준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는 레몬 같은 거 억지로 먹이지 말고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잠에서 막 깬 아내가 부시시 일어나며 떡볶이 해줄 테니 기다리란다.
‘떡볶이……?’
그래, 바로 이거야.
이거 먹이면 적어도 3일은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
떡볶이 먹고 지을 아기의 기묘한 표정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온다.
아무래도 누가 날 좀 말려줘야 할 것만 같다.
아하누가
그때 그 녀석이 2013년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이다.
2024년 현재, 이미 군대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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