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전혀 못 마신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술과 거리가 멀다.
힘센 아내는 그런 내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답답한지
가끔씩 술 얘기를 하곤 한다.
나 역시 혹시나 술도 한잔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라는 소릴 들을까 봐
술은 안 마셔도 술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너그러운 것처럼 말하고
또 행동하곤 했다.
* * *
직장에 다니는 아내가 어느날 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에 들어왔다.
회사에서 회식을 했다는데 상태를 보니 어지간히 마신 모양이었다.
연락도 없이 늦은 데다 술까지 잔뜩 마시고 들어온 아내를 보니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쉽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평소에 늘 여자라고 직장에서 술자리에 빠지지 말고 회식 자리가 있으면
2차, 3차라도 끝까지 남자 사원들하고 자리를 같이 해라,
직책도 있는 사람이니 만큼 여자니까 일찍 간다는 소리를 듣지 말도록 하라며
마치 이해심 많은 남편인 양 맘에도 없는 잔소리를 했던 터라
더더욱 뭐라고 꼭 찝어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아내는 술 마신 것도 부족했는지 이제는 배가 살살 아프다고
히스테리까지 부렸다.
점점 짜증이 났으나
동시에 무언가 이를 응징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차츰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정상적인 힘 대결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지금의 이 찬스는
하늘이 주신 기회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전의 짜증은 이미 없어지고 갑자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 * *
난 어려서부터 남보다 거칠지 못했다.
싸울 일이 있어도 먼저 피했고 남을 이길 자신이 없으면서도
스스로는 비폭력주의자라고 흐뭇해 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무력 충돌을 피함으로써 입는 다른 물질적 손해야
비폭력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억지로 자위하면 되었지만
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쌓여가는
심리적 스트레스였다. 한 마디로 약이 오르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는 얘기다.
그러던 어느날 테러라는 새로운 단어를 접하면서 나의 비폭력주의는
테러에 의한 보복주의로 바뀌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힘의 우위에 밀려 물질적 손해를 입으면
그 놈의 동생이라도 만나서 장난하는 척하며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기라도 했다(때린다는 의도를 가지고 때리면
형에게 이를 것이 뻔하므로 철저하게 위장해야 함은 당연하다).
동생이 없는 놈은 집 앞에 가서 문이라도 한 번 걷어 찼으며,
그것도 힘들면 그 놈 어머님이 내게 그 놈 어디서 놀고 있는지 보았냐고
물어볼 때 엉뚱한 대답이라도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그것이 비겁한 기습 공격식 게릴라와
무엇이 다르냐고 물을까 봐 나는 항상
상대의 불법 무력에 의한 불가피한 레지스탕스형 독립운동식 주권찾기라는
야당 대변인 스타일의 대답도 늘 준비하고 있었다.
* * *
냉정해진 심적 상태를 이용해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상황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1. 그 동안 마누라의 힘의 우위에 의한 불법 무력으로
이미 많은 피해를 보아온 상태다.
2. 그리고 나는 약이 올라 있다.
3. 또한 마누라는 지금 기진맥진한 상태다.
4. 내 특기는 기습적인 테러다.
그러니 결론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마누라의 동생은 나보다 훨씬 장대한 장정이니 동생을 쥐어박을 수도 없고
나를 괴롭히는 이 여자의 남편이라도 한 대 때리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고,
마누라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바퀴에 빵꾸라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건 결국 나만 손해고…….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처가에 전화를 했다.
전화기 버튼을 누르는 시간보다 뛰어갔다 오는 것이 더 빠를 만큼
지척에 사시는 장인, 장모님이시지만 전화가 더욱 효과적일 것 같아
옆 방에서 아내 모르게 전화했다.
지금 배가 아파 죽겠다는데 응급차를 불러야 될 것 같다고.
아기 낳으려고 그런 것도 같다며 당시 상황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달아
최고조의 긴장감을 조성했다.
득달같이 달려온 장모님께서 상태가 어떠냐고 물으시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신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술 냄새 같은데?”
나는 몰랐다는 듯 말했다. 얄밉게.
“아~ 술 마셔서 그런 건가요? 저는 술 안 마셔서 몰랐어요.”
장모님은 놀라서 뛰어오신 사실이 억울하셨는지 아니면
주무시다가 깬 것이 아까우셨는지,
아니면 사위 앞에 창피함을 느끼셨는지 그것도 아니면 아기 낳을 것 같다는
단순한 거짓말에 속았음이 분하셨는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단 한 가지 물리적 방법으로 발산하기 시작했다.
마누라는 엄청 맞았다.
나는 장모님을 말리는 척하며 틈틈이 아내 쪽으로 슬쩍 장모님을 밀어드렸고
손에 잡히는 것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시면
빗자루니 파리채니 하는 것들을 발로 슬쩍 밀어 장모님 눈에 잘 보일 수 있게
해드렸다. 아쉽게도 멍키스패너나 해머 같은 공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장모님께서 분이 조금 풀리실 때쯤 되면 슬쩍 다른 건수를 혼잣말처럼 지껄여
잠시 가라앉을 것만 같던 장모님의 전투 의욕을 북돋아 드렸다.
그러면서 장모님이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손오공처럼
수퍼사이안이길 간절히 바랬다.
한바탕 혼란이 끝나고 혼자 화장실에서 환장하며
‘나이스!’라고 불끈 쥔 주먹과 함께 외치며 오도방정을 떨다 나오니
아내는 왜 어머니에게까지 전화했냐며 볼멘 목소리로 따졌다.
“배가 아프다기에 난 큰일난 줄 알고 그랬지 뭐야…….”
“…….”
형사 콜롬보도, 수사반장도 아닌 아내는
심증이 가지만 달리 물증이 없었는지 이내 포기하고 잠자리에 든다.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장인 어른까지 오셨어야 빅 이벤트가 되었을 텐데…….
* * *
평소에 나는 스스로를 가리켜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평해왔다.
웃음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인격임에 틀림없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다.
겨우 참은 웃음을 화장실에서 몰래 해결하려니
그것도 해볼 만한 일이란 생각이 들고
또한 어디 가서 이 얘길 하면 영락없는 변태 소릴 들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참기 힘든 웃음이 나왔다.
화장실 한 구석에서 남은 웃음을 마저 웃으며 나는 생각했다.
성공한 테러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아하누가
오랜만에 이 글을다시 정리하니, 유치하면서도 새롭다.
'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루타 (0) | 2024.02.21 |
---|---|
피서지에서 생긴 일 (0) | 2024.02.21 |
가득찬 밥상은 빈상보다 아름답다 (0) | 2024.02.21 |
말못하는 아기의 곤욕 (0) | 2024.02.21 |
올림픽의 비극 (0) | 2024.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