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올림픽의 비극

아하누가 2024. 2. 21. 19:47

 

  나에게는 힘센 아내가 있다.
   키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조금 크고 덩치는 보통의 사람들 보다
   많이 나가고 손발의 크기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엄청나게 크며,
   거기에서 비롯된 힘은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7.2Kg 용량의 세탁기를 가볍게 들어 옮기며 3단 서랍장을
   이방 저방으로 옮겨 놓는다(참고로 우리집의 사랍장은
   서랍이 빠지지 않는 슬라이딩 방식이다).

   게다가 어느 누구와 싸움을 해도 지지않는 깡다구마저 있으니
   그 능력은 신비하고도 놀라울 따름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 가계에 도움이 될 경우에는 더없이 좋은
   아내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나와 적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간혹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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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인가. 올림픽 열기가 한창인 일요일이었다.
    매주 일요일이면 아침에 축구를 마치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그날 온 신문을 이리저리 펼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로 알고 있는 내게 한 순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문을 보던 중 갑자기 내 몸이 만유인력도 무시한 채
    방 한가운데를 둥둥 떠 다녔다.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 엄습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TV에서 올림픽 하이라이트를 보던 아내가
    레슬링 경기의 빳떼루 자세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는지
    엎드려 신문을 보던 나를 레슬링 선수 마냥 번쩍 들어 뒤집기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사태를 눈치채고  TV에서 본대로, 일명 빳떼루 아저씨의 구수한 해설처럼
    배를 바닥에 힘껏 붙이고 양팔을 펴 바닥에 밀착시킨 뒤 땀을 흘리면서
    방어 자세를 취해 일단 위기를 벗어났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그 일이 재미있었는지 내가 엎드려 신문만 보려 하면
    뒤에 와서 뒤집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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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후 몇 번 그 일이 반복되던 어느날, 이제는 재미없지 않냐고
    아내에게 말하려는 순간 아내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머리 위로 돌아가
    목과 머리를 잡고는 내 몸을 뒤집어 버렸다.
    그 동작은 몹시 신속하고 또한 강한 힘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어느 심판이라도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3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빳떼루 아저씨가 아니라 박치기의 명수 김일 아저씨가 해설한다 해도
    침을 튀어가며 칭찬할 만한 완벽한 기술이었다.
    아내는 그것이 ‘목 감아 돌리기’ 기술이라며 무척이나
    통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순간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타고난 힘에 저런 고도의 기술마저 붙는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또 앞으로 남은 올림픽 기간 동안 아내의 기술은
    얼마나 더 발전할 것인가? 생각하니 내 신세가 처량하게 될 것 같은
    걱정이 앞섰다.

     


    갑자기 죄 없는 TV가 원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과격한 마누라를 더 과격하게 만든 이 모든 것이 TV 탓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TV는 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들의 승전보를 전해주며
    더위를 식혀주기도 하지만 이렇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나아가 어른들의 시청률 경쟁이
    청소년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상황과는 무관한 듯하나
    나름대로 근엄한 생각도 들었다.
    올림픽 보겠다고 29인치 TV를 할부로 새로 산 사실도 후회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TV가 없던 어린 시절에 들은
    라디오 드라마 <마루치 아라치>가 상상력이라도 키워준다는 점에서
    더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TV 탓도 아니다.
    그저 남보다 조금 힘센 마누라를 데리고 살고 있는 사실을 원망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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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올림픽 열기는 한창이다.
    한동안 뜸하던 아내가 레슬링이나 한 판 하잔다.
    문득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난번 ‘목 감아 돌리기’ 이후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것 같은 신기술에 대한 기대도 생겼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종전의 빳떼루 자세가 아니라
    난데없는 스탠딩 자세를 요구하기에
    정식으로 갖출 것 갖추고 시작하자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고는
    TV에서 본 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아내는 신기술은커녕 국제 규정은 물론
    동네 아이들의 레슬링 규칙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먹’을 날리며
    반칙으로만 일관하는 것이 아닌가?
    특별한 반칙을 하지 않아도 무조건 내가 빳떼루 자세를 취해야 하는
    불공정 게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먼저 주먹을 날려 기선을 제압한 뒤
    쓰러질 때까지 주먹을 날리다
    결국 내가 쓰러지면 바로 빳떼루 자세에 의한 공격을 시도했다. 


     
    반칙을 당하지 않아도 나는 못 이긴다.
    그런데 갖가지 반칙마저 당하니 달리 방어할 방법도 없이
    그날은 매번 지기만 하는 프로레슬링의 무명 선수처럼 떡이 되어
    방바닥을 헤맸다.

    격동의 시간이 주춤할 무렵 잠시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TV가 보였다.
    29인치라 확실히 잘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TV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깊은 밤이 되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TV를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날의 올림픽 경기 하이라이트는 복싱에서 좋은 경기를 펼친
    우리 선수들의 경기 모습이었다.
    우리 선수의 좌우 훅이며 원투 스트레이트가 전혀 낯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급기야 상대 선수가 링바닥에 빌빌거리며 눕는 표정 또한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올림픽은 물론 각종 국제대회나 프로복싱 세계타이틀전 관람 경험을 통털어
    처음으로 우리나라 선수가 물씬 두들겨 팰 때
    맞는 상대 선수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저녁에 있었던 아내의 반칙에 대한 원인을 비로소 알게 된 나는
    몇 분 뒤 그나마 남은 정신마저 없어졌다.
    내일 경기 안내에 시범 종목인 태권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잠을 자면서도 계속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