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테마기행 촬영 에피소드

EPISODE-07_한시간 촬영에 일분 방영?

아하누가 2024. 7. 9. 23:57



 

방송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촬영을 해야 할까? 

 

예능프로그램을 봐도 그렇고 뉴스는 말할 것도 없다. 많이 찍어두고 짧게 이어붙여 속도를 빠르게 진행시키는 것이 요즘 방송의 흐름이다. 다큐멘터리는 말할 것도 없다. 무언가 볼만한 장면이 나오면 아낄 것 없이 찍어두고 나중에 다 삭제 또는 편집한다. 

 

세계테마기행도 마찬가지다. 해뜨기 무섭게 촬영이 시작되고 해가 지고 난 이후에도 촬영은 계속된다. 쉴 새 없이 카메라가 돌아간다. 출연자 입장에선 정말 미칠 지경이다. 

촬영 3일째 되던 날 스탭들끼리 하던 얘기가 들려왔다. PD가 촬영기사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한시간 촬영해야 1분 분량 나오는 거 몰라?"

 

헐.... 기절할 뻔했다. 

1회 방송이 40분짜리지만 실제 방송 분량은 35분 가량이니 무려 35시간 촬영해야 1회분 프로그램이 완성된다는 얘기? 

그래서 그랬는지 정말 눈물나게 찍는다. 내가 움직이기만 하면 카메라 감독과 촬영기사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가끔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 부분은 똑같이 한번 더 하기도 했다. 그때 기분은 정말 연기자가 된 기분. 물론 억지 연출을 위해 의도적인 행동을 유도하진 않는다. 다만 같은 상황을 한번 더 해달라는 부탁은 종종 하곤 한다.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촬영장을 떠돌다 화산재로 흙벽돌을 만드는 현장을 찾았다. 피상적으로 촬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런 상황이 보이면 얼른 삽을 빼앗아 일을 시작해야 된다는 것쯤은 이제 눈치껏 알게 되었다. 삽을 들고 열심히 벽돌을 만들었다. 숙련공이 아니니 당연히 잘 만들어질 리는 없고, 엉터리로 만들어진 벽돌이 힘없이 무너질 때마다 옆에 있던 현지인들과 호탕하게 웃었다. 리액션이 좋으니 출연자인 나도 신이 나서 점점 더 과감한 액션을 취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이제야 비로소 카메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고, 나름 멋진 그림이 나왔을 거라 생각했다. 

 

아쉽게도 방송이 시작되고 내가 힘들게 삽질해서 벽돌을 만드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그 때 아팠던 허리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시간 촬영에 일분 방영'이라는 공식이라 당연히 잘려나간 부분도 많을 테지만 왠지 속상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도 이 장면은 흔적이나 남아 있지 뒷부분에 가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흘린 땀의 기억만 남아 있는 사건들도 엄청나게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방송은 땀으로 만든다고 하는 모양이다. 

 

 

2015년 9월. EBS 세계테마기행 촬영중

필리핀 루손섬 레가스피에서

 

 


흘러내려온 화산재가 섞인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장면. 

이 상황에서 나 역시 수많은 벽돌을 찍었지만 단 한 장면도 방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