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테마기행 촬영 에피소드

EPISODE-04_길거리에서 춤을 추라구요?

아하누가 2024. 7. 9. 23:47


"지금 여기서 춤을 추라구요? 나 춤 못춘단 말입니다!"

 

20일간의 대장정 중 첫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제작진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촬영을 위해 목적지로 가던 도중 정체를 알 수 없는 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있었고, 뭔가 흥미로운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제작진은 카메라를 세팅하고 얼른 차에서 뛰어내렸다. 출연자인 나도 당연히 덩달아 뛰어내렸다. 행렬의 정체는 한 대학교 행사를 알리는 대학생들의 행렬이었고, 필리핀이 늘 그렇듯 이런 일이 생기면 동네 사람들도 모여서 교통정체마저 유발시키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이런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고, 이런 일로 교통이 정체된다고 짜증내는 사람도 없는 일이다. 

 

얼른 행렬에 참여해서 마치 리포터처럼 여기저기 묻고 다니던 중 한 아주머니가 퍼레이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빨리 저 옆으로 가서 춤추세요!"

 

제작진의 지시가 떨어졌다. 

 

"길거리에서 춤을 추라구요?"

 

나도 <EBS 세계테마기행>의 애청자이니 그 정도 장면은 매우 자연스러운 장면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남들 앞에서 춤을 출만큼의 넉살을 갖추고 있지도 않고, 특히 춤에 어울리지 않는 저주받은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다.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제작진의 의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긴 싫었다. 

 

처음 <EBS 세계테마기행>과 계약했을 때 나는 필리핀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두 얼굴의 필리핀>이란 저서를 통해서도 필리핀에 대해 잘못 알려진 오해를 풀고자 했고, 특히 이런 좋은 기회에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진 필리핀의 부정적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벗겨내고 싶었다. 그러나 방송은 제작진의 기획의도가 있고, 방송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나는 단지 일개 출연자일 뿐이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일단 카메라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되지도 않는 뻣뻣한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오고 외국인이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하니 주변 사람들은 뭔가 볼거리가 생긴 듯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웬만한 뻔뻔함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방송을 주업으로 하는 연예인이라면 모를까 일반인들에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춤을 추기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됐다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이런 행동을 강요한 제작진 탓이라고 원망하기도 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춤을 추면서도 나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내가 여기서 왜 춤을 추어야 하는가에 대한 항의를 했다. 제작진은 이런 의도를 순수하게 오해(?)했는지 방송 자막으로 그대로 나왔다. 

 


그리고 단체 사진을 찍는 여대생들이 보이자 제작진은 거기 뛰어들어서 같이 사진 찍는 장면을 요구했고, 나는 '이왕 버린 몸'이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매우 밝게 웃으며 촬영에 동참했다. 

훗날 이 방송을 본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내게 여대생들하고 어울린다고 너무 넋놓고 웃었다고 놀렸지만 저 때 속마음은 매우 짜증스럽고 화가 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로 보아 내게도 나도 알지 못했던 연예인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의 이 장면에서 어느 쾌활한 여학생이 내게 질문했다. 

 

"우리들 중에 누가 제일 이뻐요?"

 

당연히 질문한 학생을 가리켜 네가 제일 이쁘다고 했다. 소녀들 마냥 까르르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여학생이 다가와 자신은 어떠냐고 물었다. 필리핀 말로 대답했다.

 

"빵잇!"

 

못생겼다는 말이었다. 여대생들은 또 자지러지듯 까르르 웃었다. 분위기는 참 좋았다. 

 

훗날 이 장면이 편집되고 EBS 측에서는 여자에게 대놓고 못생겼다는 말을 했다며 이 부분 음성을 삭제했다. 필리핀 정서를 알았다면 이런 농담은 매우 유쾌한 장면이었을텐데 못내 아쉽기도 하다. 

 

촬영은 이렇게 시작됐다. 

현지로 출발하기 전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쉽게 그려지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방송이란 게 다 그렇겠지만 이 방송 또한 출연자는 연기자에 더 가깝다. 내가 생각한 방송의 의도는 제작진의 의도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였다.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느낌도 왔다. 남은 일정 동안 무사히 촬영을 마치려면 이 부분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2015년 9월. EBS 세계테마기행 촬영중

필리핀 남부도시 레가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