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을 위한 현지 출발을 앞두고 짐을 꾸렸다.
촬영스탭은 미리 내게 여행용 캐리어나 뭔가 있어보이는 여행가방은 꿈도 꾸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 시켰다. 촬영전 회의를 통해 동선과 일정을 파악하니 잘 차려입은 신사가 점잖은 모습으로 화면에 나오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억울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멋을 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일단 짐을 꾸렸다. 모든 짐은 등산용 배낭에 담아야 했고, 신발은 반드시 등산화가 필요하다고 해서 급히 구입했다. 챙이 넓은 등산용 모자도 당연히 준비했다.
바리바리 싸서 들고다닌 20일간의 짐
출발전 공항버스를 기다리며 셀카 한장
<EBS 세계테마기행>은 모두 4개의 외주업체가 제작한다. 4개의 업체는 경쟁을 통해 평가 받게 되고, 평가에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업체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경쟁은 순수하게 시청률만으로 평가한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4개 업체는 저마다 자신만의 컨셉을 가지고 있다. 럭셔리한 여행을 테마로 하는 기획, 젊은 큐레이터를 기용하는 컨셉 등 저마다 개성을 뽐낸다. 내가 큐레이터를 맡게 될 제작업체의 컨셉은? 내게는 너무나 불행히도 '오지'와 '극한'이다. 시작부터 고생길이 열렸다.
하지만 고생은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방송에 처음 출연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의 모습이 TV를 통해 멋지게 보여지길 원하는 것뿐이다. 어떤 상황이 오든 결과물에서 멋있게 나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니까.
그런 생각으로 일정에 참여했지만 오지와 극한을 강조하는 기획은 만만치 않았다. 첫날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서 입국 신고를 하고 숙소에 온 시간이 새벽 2시경. 바로 아침 8시 비행기로 남부 도시 레가스피로 이동해야 하니 4시간 이후인 6시경에는 공항으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도 무시무시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짧은 휴식 시간이었지만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촬영을 위해 나름 샤워도 하고 로션도 발랐다. 촬영 때 입을 옷도 다시 살펴보고 거울도 여러번 봤다. 남들 안볼 때 말하는 연습도 해보고 나름 멋져 보이는 표정을 짓는 연습도 해봤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앙증맞은 바람은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닿게 됐다.
촬영 3일만에 나는 거지 모습이 됐다.
2015년 9월. 필리핀 남부도시 레가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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