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구성이 주로 신간 오지를 찾는 컨셉이어서 주로 시골에서 촬영하게 된다. 필리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다지 볼거리 없는 시골에서 방송용 카메라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드론이 날아다니면 온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촬영을 시작하면 언제 모여들었는지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몰려서 서있다.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어른들은 한발 물러나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무슨 촬영이냐고 물어보면 일일이 설명하기가 힘들었을텐데, 고맙게도 이들은 '영화촬영이냐?'고 먼저 물어본다. 촬영에 집중하고 있는 스탭들은 영혼없는 말투로 'YES'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그들 사이에서 '영화촬영이래....'라는 말이 순식간에 돌아버린다. 그러면 그 다음에 돌아오는 두번째 질문이 있다.
"누가 악또르래?"
악또르는 영어의 액터(Actor)를 필리핀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필리핀에서는 자주 듣는 친숙한 영어다. 의사는 당연히 독또르(Doctor)라고 한다.
그러다 촬영이 시작되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내가 출연자라는 것은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또 수근거린다.
"저 사람이 악또르인가벼?"
뭐 이런 말들이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오고 간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간단하게 끝나는데, 사람들은 촬영장면을 신기하게 들여다보다 계속 말을 이어 가게 된다.
"저 사람이 악또르여?"
"저 사람 이름이 헥또르여?"
"저 냥반 이름이 헥또르래...."
이렇게 이야기는 퍼져 나간다. 너무 가까이 붙어서 얘기하니 촬영하는 내 귀에도 쏙쏙 잘 들어온다.
헥또르는 필리핀의 흔한 이름으로, 스페니쉬 이름인 엑토르(Hector)다. 이렇게 이름과 직업이 구경꾼에 의해 정해져 버리니, 2~3일간 촬영해야 하는 마을에서는 내가 오갈 때마다 사람들이 내게 "헬로, 헥또르!"를 외치곤 했다. 그 뒤론 나도 아예 포기하고 동네 사람들이 이름 물어보면 헥또르라고 말하고 다니곤 했다. 졸지에 타국에 와서 한국의 '영화배우'가 됐다.
이미 필리핀에도 한류 열풍이 크게 불어 사람들은 웬만한 한국 배우들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이민호 같은 배우는 필리핀 최대 통신기업의 광고모델로 출연하여 '안녕하세요'라는 한국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인지도가 상당히 높고,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외모야 이민호와 비교도 안되겠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온 영화배우니 뭔가 좋은 시선으로 봐주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치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서 인사하면 밝은 얼굴로 받아주고, 촬영 중 쉬는 시간에도 싸가지 없이 담배를 꼬나문다거나,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하는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했던 걸 보니 이 땅에서 나고자라 교육받은 충효사상 교육의 영향은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이름으로 불려봤고, 살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영화배우가 되어 봤다. 바쁜 스케줄 사이에서 생겨나는 작은 해프닝은 커다란 활력이 되곤 한다.
사람들 모두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2015. 9
EBS 세계테마기행 촬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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